매일성경 묵상
이혼에 대하여[마 19:1-12]
 – 2023년 03월 10일
– 2023년 03월 10일 –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주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시작하실 것이다. 곧 죽으심을 향해 나아가신다. 19장과 20장에서는 갈릴리에서 유다로 이동하시며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리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이 여정에도 수많은 무리들이 뒤따른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치유하신다. 본문은 이혼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바리새인들은 이혼 문제로 주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율법을 오용하는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시며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신다. 또, 선천적으로 그리고 인위적이고 자발적인 독신이 있음을 인정하신다.
 
 
지금 한국사회는 극심한 저출산의 늪에 빠진지 오래다. 대책을 세워 변화를 시킬 수 있는 골든타임을 이 문제만큼은 한참을 지났다고 다수의 학자들이 좌절한다. 저출산 문제는 결혼 문제와 짝을 이루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역시 긍정적이지 않다. 점점 비혼주의가 확산되고 있고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부부의 비율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2022년 전체 결혼 건수는 조사를 시작한 이래 사상 처음으로 20만건을 넘지 못했다. 반면 이혼은 전체적인 이혼 건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결혼한지 30년 이상 된 부부의 황혼 이혼은 2022년 기준 전년 대비 7.5%(1,240건), 10년전과 비교해 2.2배 증가했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혼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이혼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1.왜곡된 율법의 뜻을 바르게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였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주님께서는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3~6절)고 말씀하셨다. 이 부분까지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모세의 법을 인용하여 따져 묻는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7절) 이 말씀은 신명기 24:1-4에서 인용한 말씀인데 주님께서는 그 법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않다”(8절)라고 말씀 하시고는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 라고 하셨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엄중한 예식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혼은 적극적인 명령이 아닌 불가피한 허용이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 주어 이혼하게 한 것은 이혼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횡포로부터 결혼 자체와 사회적인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음행이 아니라면 이혼도 간음이다. 간음을 미화하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더욱 순결하게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한다.
 
 
 
2.이혼에 대하여
당시 유대의 바리새인 사회에는 “샴마이”와 “힐렐”학파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결혼과 이혼 문제에 대하여 샴마이 학파는 주님의 가르침과 같이 보수적으로 가르쳤지만, 힐렐 학파는 “아내가 음식을 망치기만 하더라도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말이 안되지만 당시의 “아키바라”라는 랍비는 “남편이 아내보다 더 예쁜 다른 여자를 발견하기만 해도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까지 했다. 당시에는 안타깝게도 힐렐학파와 아키바라의 주장에 따라 이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주님께서 분명한 이혼 사유는 “음행”이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결혼을 자기 욕망을 좇아 손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과 확연히 구별되는 제자들에게는 독신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혼자 살아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마땅히 결혼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아내를 물건 취급하는 당시의 가치관에 면죄부를 주는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을 주님께서 바로 잡아주셨다.
 
 
*바리새인의 질문은 매우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어떻게든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굴레를 씌워 고발할 이유와 트집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무시한다는 인상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당시 헤롯 안티파스가 본처를 버리고 형제 빌립의 아내를 취한 문제 때문에 세례 요한이 처형 되었는데, 이와 동일한 말을 주님께서 한다면 이를 빌미로 주님을 제거하려는 악의에 가득찬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이도 하나님, 사람이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을 정하신 것도 하나님, 그렇게 짝을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혼하거나 독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신다. 다만 모세가 이혼에 대하여 허용하는 것 같은 “이혼 증서를 써 주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혼증서라도 있어야 여인이 새출발을 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생기기 때문에 당시 약자 중의 약자였던 여인을 위한 배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배려를 악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함을 한탄하신 것이다.
 
교묘하게 하나님의 뜻에 담긴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의와 왜곡된 해석을 남용하여 심각하고 교묘하게 하난미의 뜻을 왜곡하게 한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를 동시에 비판하신다.
 
 
 
3.유연한 결혼과 이혼에 대한 적용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0절) 이 말에는 아내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결혼하기 싫다는 뜻일까?
 
제자들의 모습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상당히 불손하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결혼과 아내에 대한 생각은 그저 자신들의 욕망의 출구와 이기적인 소유 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당시의 인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장가들지 않는 세 부류가 있다고 대답하셨다. 아에 나면서 부터 그런 이들이 있고, 살다가 타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이들이 있으며,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고 하셨다. 이 세 가지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수용한다면 이를 받을만한 자들이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전통과 유전과 세상의 풍토를 따른다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당시 유대사회보다 더 심각하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세상의 생각은 철저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이다. 물론 당시 사회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가 되었기에 결혼과 이혼에 대한 더 많은 복잡한 상황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렇기에 섣불리 겉으로 보이는 결과로만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직접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살아가면서 이혼이라는 상황에 대하여 먼저 약자의 삶을 고려하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은 변치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조차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뜻(소견)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보다 더 우선하려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이와같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이용한다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의 이혼에 대한 해석이 “샴마이”와 “힐렐”로 나누어지는 것도 이와같은 이유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을 수 있게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을 이렇게 이용하시는 것에(신 24:1-4_이혼증서) 대해 정확히 간파하셨다. 그리고 율법의 다른 가르침을(창 1:27, 2:24_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 예로 들어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를 설명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기울이지 않는다.
 
*내가 올바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덜 배워서 모르기 때문이기 보다 깊이 새겨듣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당시 자기 욕망을 좇아 손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독신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혼자 살아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결혼에 대하여 순종하여야 한다.
 
-비혼과 독신을 문화의 트렌드로 여기고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소견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결혼조차 “좁은 길”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는지, 독신을 편견없이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혼은 적극적인 명령이 아닌 불가피한 허용이다. 모세가 가르친 이혼 증설르 써주라는 말은 이혼을 쉽게 하게 하련느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횡포로부터 결혼 자체와 약자중의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다. 오늘날도 이혼 제도를 자신의 욕망과 유익을 위해 남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처사이다. 불가피하게 이혼 할 수 밖에 없는 경우 외에는 자기 욕망을 따라 결정해서는 안 된다.
 
-특히 간음을 미화하는 세상의 문화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음을 지키고 가정을 지켜내기 위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고 그 안에서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누리는 축복된 길이다.
 
 
 
 
*주님, 나의 욕심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려는 유혹에 늘 깨어있겠습니다.
*주님, 이혼 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삶의 환경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 욕망을 따라 이혼하려는 이들은 더 많습니다. 이와같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려는 좁은 길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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