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들어가나?[마 19:13-30]
 – 2023년 03월 11일
– 2023년 03월 11일 –
사람들이 주님의 안수를 받게 하기 위해 자녀들을 데려온다. 제자들은 아이들을 막아서며 꾸짖는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질타하고 아이들에게 안수해 주신다. 또, 한 부자 청년이 주님께 영생을 얻을 방법을 묻는다. 계명을 온전하게 지키라는 말씀에 자신있게 다 지켰다고 대답하지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 근심하고 돌아간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단언하셨다. 베드로는 이 모습을 보며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무엇을 얻겠는지 묻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을 은혜를 말씀해 주시면서 경고도 겸하여 주신다.
 
 
 
1.어린 아이처럼, 혹은 어린 아이를 데려온(13-15절)
무리가 자녀들을 주님께 데려와 안수해 주시기를 원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제자들이 아이들을 꾸짖는다. 당시 유대사회의 아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이다. 그러나 18:10에서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했어야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이들을 용납하고 접근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어린아이들을 받아 주시고 안수하여 복을 빌어 주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기댈 것을 찾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같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환영받는 곳이고 약자들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나라이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은혜를 기대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있을까?
 
 
한편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는(14절) 말씀을 어린아이를 데려온 부모로 해석하면 아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기대하고 주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는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하는데 있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막아서고 꾸짖는 제자들의 심리는 당시 일반적인 정서이기도 하지만, 아이들까지 굳이 섬길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마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는 나이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함을 몸소 보여 주신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따라 모든 이들의 출입에 제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2.부자 청년(16-22절)
앞서 꾸지람을 서슴치 않고 제지하였던 제자들은 한 사람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부자였기에 외모에서부터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면 존경을 표했고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였다.
 
그가 질문한 의도에서 이미 선한 일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엿보인다. 주님께서는 청년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먼저 물어보시면서 하나님만이 선한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기준이 곧 선한 일임을 강조하신다.
 
그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청년은 어떤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지 자신있게 묻는다. 이에 주님께서는 십계명의 5계명부터 9계명까지를 말씀하신다. 순서로 보면 6, 7, 8, 9, 5계명이고 여기에 이웃사랑 명령을 더하신다. 청년은 당당하게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내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되묻는다. 아주 충만한 자신감이다. 마치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스스로 여기듯 말한다.
 
그는 율법의 행위에서는 완전했을 수 있다, 하지만 율법의 정신과 뜻에 대하여는 어떤지 모르겠다. 주님께서는 이 청년을 항햐여 “지금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매우 충격적이다. 청년도 충격을 받은 듯 아쉽게도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떠난다.
 
*이 청년은 경건하고 부유하나 자신의 영적인 갈망에서 오는 영적 빈곤에 매우 솔직했다. 그리고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메시아 되신 주님께 나아온 것을 보면 매우 겸손하다. 하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만한 절박함이 없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는 부자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치를 일깨워 주셨다. 청년이 이 계명들을 다 지킨 것이라고 말하자,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이는 부자 청년이 이제껏 가난한 이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 소유를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각자의 탐심을 경계하는 열 번째 계명의 적극적인 실천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만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나라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 예고를 들으시면서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 이 청년도 결국 주님 때신에 많은 재물을 포기하고 근심만 남기고 떠난다. 이 청년은 결국 “근심하면서”, 주님 대신 많은 재물을 선택함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거절했다.
 
 
 
3.대화_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23-30절)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길이 있다.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을 이행하면 된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라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만 여기지 말고 원래 주인되신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의미이다. 즉, 청지기의 삶을 포기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소유가 많든 적든 자기의 소유권을 여전히 자기의 것으로 고수하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재물이기에 주님의 마음과 뜻대로 순종하며 재물을 나누는 이는 하나님 나라에 거한다. 부자는 자기 재물로 생각하고 지키려 하기에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부자는 주님께서 맡기신 재물이라는 믿음과 주님의 마음과 뜻대로 재물을 사용하는 순종의 사람이다. 이런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쯤이야 자기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쉽게 통과한다.
 
자신의 소유권을 주님께 이전하지 못한 삶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문제는 자기 소유권을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단회적인 선언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삶이라는 점이다. 한 두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갈림길에서 늘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말로는 얼마든지 그렇다고 해도 실제적으로 소유에 대한 자기 부인은 멈칫 멈칫 한다. 이런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아닌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나의 힘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은 부자 청년은 자신이 기꺼이 지키기 어려울 듯한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기 소유와 관련된 도전이었다. 자기 소유에 대한 도전은 자기 소유권에 대한 포기, 주님의 소유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믿음은 자기 의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철저한 지킴을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러한 껍데기 경건을 주저함 없이 깨뜨려 주시고 새롭게 살아갈 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길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 새롭고 산 길은 재물에 대한 진정한 소유권이 주님께 있기에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기꺼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은 자기 재물만큼은 자기의 것이라는 권리를 포기하기가 주저됐고 결국 재물을 택하고 주님께서 열어 주신 하나님 나라를 포기한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이 부자 청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재목감으로 여겼던것 같다. 제자들도 역시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 영성과 그가 보여주는 능력(재력)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서 냉정하게 돌아서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25절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새번역)
 
주님의 대답은 단순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26절).
 
베드로는 즉각 반응하며 질문했다. 부자 청년과는 달리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27절).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처럼 한 두번의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음의 결단과 순종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을 상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
 
세상이 새롭게 되고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제자들이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며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세상이 새롭게 되고 인자각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말은 “부활과 승천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제자들이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것은 성령 강림 이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이 사역을 통해 선포되고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때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거짓 왕들(재물을 포함하여)과 싸워야할 사명이 동시에 주어진다.
 
또 더 많은 보상과 영생을 상속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하게 물질적인 풍성함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장차 받게 될 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믿음이 결국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님꼐서 말씀하시는 보상과 영생의 상속은 겨룩ㄱ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거나 천국 백성이 되는 것,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뢓과 승천 이후 제자들의 삶의 여정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핍박과 고난의 여정이었다. 물질이 있어서 풍성한 여정이 아니었다. 물질의 풍성함과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개 주어진 모든 소유, 관계, 시간, 은사와 능력 등의 모든 소유권이 온전히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다. 이는 사람의 경건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 글허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내가 구원을 받아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겸손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자 청년처럼 겉으로는 믿음의 경건함이 철두철미하나,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 삶에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주는 것에 고민만 하고 인색한 삶은 자기 소유에 대한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나를 사로 잡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집착되고 사로잡힌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는 은혜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를 소망해 본다.
 
 
 
 
*주님, 그저 주님앞에 달려 오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을 잃지 않겠습니다.
*주님,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재물이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지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적든 많든 제게 맡겨 주신 재물을 주님의 마음과 뜻대로 잘 사용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