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은혜 안에 있기에….[마 20:1-16]
 – 2023년 03월 12일
– 2023년 03월 12일 –
주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19:30, 20:16)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설명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품삯을 정산한다. 가장 나중에 들어와서 한 시간 일한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모두가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삯을 받자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와서 일한 품꾼들이 원망한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세상 논리와 보상심리에 젖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논리와 참 제자도를 교훈하신다.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주릴 따른 보상이 무엏ㅅ이냐는 베드로의 질문은 “수고한 만큼 합당한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가 분명 엿보인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반전의 말씀을 전하시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임을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선명하게 알려주신다. 이 비유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 특유의 선민사상과 그들에게 맡겨주신 온 세상을 향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자기들만의 영광으로 합리화 시켜 버린 완고함을 고발하며, 오히려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일하러 온 품꾼의 불평하는 모습이 아닌가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을 자신들의 열심에 대한 조건 보상으로 전락시켜 버린 교만함도 동시에 지적하시는 비유이기도 하다.
 
 
 
1.천국은 마치(1-7절)
하나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새번역). 이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기로 계약하고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단지 포도원의 일을 시키려고 일꾼들을 부른 것만이 아닌듯 하다. 왜냐하면 해뜰 때(오전 6시)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들여보낸 후 제삼시(오전 9시_3절), 또 제육시(정오)와 제구시(오후 3시_5절)에도 장터에 나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다.  뿐만 아니라 제십일시(오후 5시_6절)에도 장터에서 일거리를 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다.
 
*이 비유는 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일에 우리를 부르실 때 정한 시간에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부르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일거리를 구하지 못해 놀고 있는 일꾼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세상은 사람의 가치를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로만 여긴다. 생산성만으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 그렇기에 일과 성과 중심의 세상의 가치대로라면 주인은 해뜰 무렵 일을 시작할 때 한꺼번에 사람들을 포도원을 들여보내고 일만 진행 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정한 시간과 때만 기회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주인의 주권에 따라 언제든지 일할 기회를 장터에 나가 일꾼을 구한 것처럼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기회를 주신다. 즉 일의 생산성이 중심이 아니라 주인의 결정이 중심이다.
 
*하나님 나라는 생산성이 중심이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품꾼들의 삶을 돌아보는 “인간성”이 먼저이다. 교회공동체가 잊지 말아야 할 자세가 아닌가? 경제성, 합리성, 타당성, 상식선 등을 따지고 계산하여 일을 진행하는 것은 세상 논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지혜롭고 검소한 원리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결정은 계산적인 결정이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성을 따르는 결정은 때로 손해를 보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도 마땅히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결정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일을 진행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시간을 따라 장터에 나가도 늘 일거리를 찾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일꾼들의 삶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초점이다.
 
*더구나 제십일시에 나가도 여전히 일거리를 기다리는 일꾼들이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7절)”는 말을 통해 보면 운이 없어 일거리를 못찾았기 보다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일을 시키기에는 어딘가 부담 스러운 조건이었을 수 있겠다. 그런데도 포도원 주인은 망설임 없이 그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다.
 
 
 
2.품삯 정산과 먼저 일한 자들의 원망(8-12절)
날이 저물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일꾼들의 삯을 지불한다. 그런데 주인은 웬일인지 가장 늦은 제십일시(오후 5시)에 들어온 일꾼부터 장산하되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라고 명령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다 받은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품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마음 속에 재빠른 계산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저 정도면 나는 한 데나리온 보다 더 받겠지?” 라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들이 각각 포도원으로 들어올 때 해뜰 때부터 들어온 사람들은 정확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말해 주었지만, 각각 “상당하게(디카이오스)” 주겠다고 했었다(4절). 이것은 ‘정당하게’, ‘걸맞게’, ‘합당하게’라는 뜻으로 당시 일일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 통용되던 사회적 합의가 담긴 표현이었다.
 
그러니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으로 자신들을 그보다 더 받게 될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의 기대는 다른 이들보다 더 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주인은 모두에게 동일한 한 데나리온을 지급한다. 노동 시간과 상관 없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이다. 기대감은 산산조각이 났고 기대가 컸던 만큼 불만은 더 클수 밖에 없었다. 특히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을 한 사람들은 선선한 오후에 들어와 고작 한 시간 일한 자들과 동일하게 대우 받은 것에 분노했다. 이것은 분명히 부당한 일이라고 여겼다.
 
*새벽에 고용되었을 때의 고마움은 온간데없고 마치 손해를 본 사람인것처럼 불만을 표출한다.
 
 
 
3.주인의 반론(13-16절)
주인은 그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하러 온 일꾼들은 자연스레 불만의 목소리를 주인에게 토해냈다. 주인은 그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주인 자신은 품삯에 대한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들어온 자들에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정확하게 지불했다. 법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또한 주인은 나중에 온 자들에게도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선을 베푸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뜻이었기에 자신의 넉넉함을 가난한 일꾼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소유로 선을 베푸는 주인을 어떻게 부당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선한 그를 악하게 치부하는 그들이 악한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처럼 선하신 뜻대로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아무도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불러주신 은혜에 동참하는 나라이다. 이 은혜를 누리거나 감사하지 않고 차별되는 보상을 바란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중된 사람이다. 수고한 시간에 따라, 양에 비례하여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교만의 정수일 수 있다.
 
 
*19:30절은 베드로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라는 질문에 대한 주님의 결론적인 답변이다. 그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러나 16절에서 주님의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대한 결론을 정리하면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셨다. 이는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을 품삯을 정산할 때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진행했고 이에 대하여 가장 먼저 온 품꾼의 불평어린 반응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일찍 부름 받아 더 많은 일을 한 것이 결코 억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명예이자 영광이라는 주님의 대답을 환기시켜(19:28-29) 주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두는 그의 선하시고 자비로운 은혜를 덧입었다. 그것은 어떤 차별이나 비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하고 자비로운 주인의 포도원에서 일한 것은 손해가 아니라 복된 것이다.
 
*오늘이라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그 선하고 자비로운 주인을 위해 쏟을 수 있다는 것은 명예이자 영광인 것이다. 더 많이 일했다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할 필요없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 그것보다 더 큰 보상은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일하는 내내 선하고 자비로운 주인의 은혜와 보호 아래 있었다. 가장 먼저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은 가장 많은 일을 한 것도 있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은혜 안에 거한 자들이다. 익서 자체가 곧 복이며 감사할 일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를 이유가 된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장터로 나가서 일할 일꾼을 찾았다. 할 일이 많을 수도 있지만, 하루 벌기 위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기다리는 품꾼들을 위한 주인의 배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새벽부터 서둘러 일거리를 얻은 자신의 노력과 성실함도 중요하지만 새벽부터 일꾼을 찾아준 주인의 긍휼과 은혜이기도 한 것이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얻고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포도원보다 품꾼들을 더 생각하는 주인이다. 이미 품꾼들을 들여보냈는데도 삼시(오전 9시)와 육시(정오), 구시(오후 3시)에도 장터에 나가 일거리를 찾고 있는 품꾼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낸다. 이쯤되면 주인의 관심은 포도원의 일이 아니다. 일거리를 간절하게 찾는 품꾼들을 위해 그들에게 삯을 주기 위해 일거리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지어 십일시(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갔다. 하루가 저물기 직전이기에 일꾼을 찾으러 간 것 자체가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간에도 장터에는 일거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분명히 약한 자이고 작은 자이다. 즉, 일을 가장 못할 조건을 가진 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일할 기회를 준다. 이것이 은혜이다.
 
 
-품삯을 지불할 때 더 놀라운 은혜가 일어난다. 사실 일자리를 구한 것만으로도 이들에게는 이미 축복중의 축복이다.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상당하게(걸맞게)” 품삯을 약속했다. 일자리를 구한 것 만으로도 은혜지만, 삯을 받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주인은 일한 시간에 따라 비례하여 삯을 주지 않고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모두에게 나누어 준다. 이에 가장 반발한 사람은 가장 일찍와서 일한 일꾼이었다. 더 많이 받을 줄로 생각하였는데 똑같이 받으니 감사가 사라져 버렸다. 반대로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가장 크게 놀라고 감동했을 것은 당연하다.
 
*약속한대로 받았는데,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은 불평에 잠겼고 오후 5시에 온 일꾼은 감동을 받았다. 하난미 나라는 은혜의 원리로 작동되는 나라이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더 큰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기 때문이다.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음에도 이것을 불평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반응이 신앙을 결정한다.
 
 
 
*주님, 은혜 안에 있음을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먼저 은혜안에 있었음을 감사하며 내가 원하고 계산한 대로 이룽어지지 않음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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