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겸손과 평화의 왕께서 예루살렘 성으로[마 21:1-11]
 – 2023년 03월 14일
– 2023년 03월 14일 –
마태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압축적으로 기술한다.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려 나귀를 타고 무리의 환호 속에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입성하신다. 21장부터 28장 15절까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루살렘 입성부터 부활에 이르는 일주일간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격동의 한 주간이다. 마태는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이를 뒤따르는 갈릴리에서부터 이루어진 유월절 순례객들의 환호성과 성 안의 백성들의 생경한 반응을(10-11절) 대조하며 일주일 동안 팽팽하게 대립된 갈등들을 예고한다.
 
 
 
 
1.예루살렘 입성 준비(1-5절)
주님께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셨다(1절).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풀어서 끌고 오라(2절)고 하신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하셨다(3절). 주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신 것은 사 69:11과 슥 9:9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셨다(4-5절).
 
주님께서는 복음서들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공생애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짐승을 타보신 적이 없다. 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 직전의 벳바게까지 약 200km를 줄곧 걸어서 오셨다. 게다가 유절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길은 통상적으로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까지 고작 2~3km 남겨두고 나귀를 타고 가시려고 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가 있는 행동이셨다. 유대인들에게 나귀는 겸손과 순종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왜냐하면 나귀는 자기 주인이 정해 준 구유에서만 먹는 짐승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이 당시 사람들은 나귀는 자기 주인에게만 순종하는 짐승으로 인식 되었다. 예루살렘에 왕이(메시아가) 임하실 때 순종과 겸손의 이미지를 가진 나귀를 타신다는 것은 그 왕이 곧 순종과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인식을 가지게 된 계기는 바벨론 포로시대부터라고 한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한 대가로 예루살렘 멸망하고 자신들이 바벨론 끌려왔기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께 이런 불순종과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자기들 위에 세워지는 왕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순종하고 겸손할 수 있는 왕이 세워져야 한다는 데 뜻이 모아졌다고 한다.  그래야 자신들도 그 모습을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왕은 순종과 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스가랴 9장 9절에 나타난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새번역) 결국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과 순종을 가지신 왕이며, 그 겸손과 순종을 백성들이 배워서 모든 백성이 하난미 앞에 순종과 겸손한 백성으로 자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이다.
 
 
또, “주가 쓰시겠다 하라(3절)”고 말하면 흔쾌히 내어 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가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이 가장 고조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통해 자유함을 얻은 절기 였기에, 유대의 전통은 메시아가 오신다면 유월절 기간에 오실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반드시 나귀를 타고 온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표적들을 잘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가 쓰시겠다”는 말과 함께 나귀를 징발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는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는 의미이고 그 메시아가 사용하시기 위해 자신의 나귀가 징발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동참하지 않을 백성은 없었다. 순종하지 않을 백성은 없었다. 그것은 나귀 주인에게는 크나큰 영광과 즐거움이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과 감동 만으로도 주님을 위해 즐겁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이 나에게도 확실하게 있기를 점검해 본다. 주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과 은사등을 내어 드리는 것에 세상의 가치과 계산법으로 인해 주저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순종하는 믿음의 순수함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겠다. 무엇보다 말씀의 감동과 권위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계산법보다 늘 위에 있기를 노력해야 겠다.
 
*말씀 앞에서는 겸손과 순종의 모습으로, 세상의 계산법 앞에서는 믿음의 담대함으로 서는 삶이 되어야지….
 
 
 
 
2.예루살렘 입성(6-11절)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 하였다.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순종했다. 예루살렘 입성은 “순종”하는 제자와 나귀 주인으로 행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 생각이나 논리, 계산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루살렘 입성은 스가랴의 말씀을 성취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귀를 가져 온 두 제자는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어 주님께서 앉으시게 했고, 주님의 뒤를 따르던 큰 무리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7-8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은 매우 중요했다. 겉옷은 “탈릿”이라고 불렸고 그거에는 옷단술이 붙어 있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613개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서약의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겉옷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성을 상징하는 옷단술에 의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구였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겉옷을 길에 펴고 그 위에 앉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겉옷은 소중했기에 그만큼 조심스럽게(귀하게) 다뤄져야 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임재는 고귀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호와께로부터 보내진 왕인 메시아는 이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폈다. 이것은 “나의 모든 것, 나의 인격, 지위, 권위 등등 삶의 모든 것이 메시아의 발 아래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메시아이십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왕으로 오신 이의 발이 땅에 닿지 않기를 바랍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무리들은 겉옷을 땅에 펴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에 따르는 무리들이 동일하게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절)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칠 때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 왕과 백성”이라는 관계성으로 명확하게 인식하며 외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 안에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서 건져내거나 또는 그 나라의 왕이 자기의 백성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구원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포함된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호산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요청하는 표현이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앞 뒤에서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것은 “하나님 구원해 주소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셔서 실제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주소서”라는 간절한 외침이었고, 동시에 주님께서 이 구원을 행하실 분이시라는 환호성이었다. 아마도 무리들은 주님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이로 간절히 바랬던 것 같고, 혹은 그 무엇인가로부터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했었던 듯 하다. 무리들의 “호산나” 외침에는 주님께서 바로 그 호산나(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를 실제적으로 이행하여 줄 메시아가 되어 주실 것을 원하는 함성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예루살렘 성에 입성 했는데, 성 안의 사람들의 반응은 “소동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의 뒤를 따라 형성된 유월절 순례단의 무리들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로 찬양하고 이에 합당한 예배(겉옷을 펴고, 무가지를 펴며, 호산나 찬양)를 드렸지만 성 안의 사람들은 이것을 그저 불편한 소동과 소음으로만 치부하였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표현이 주님의 앞 뒤를 따르며 외친 “다윗의 자손이여”와 성 안 사람들의 표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선지자”이다. 마태는 초반부에서부터 주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하였다. 주님께서 혈통적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반적이고 세상적인 왕이라기 보다는 이사야 11장에서 언급되었고 그 이름에서도 이미 성격이 드러나듯이 “모든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해서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시는 왕”으로 오신 분이셨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 안의 백성들은 달랐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그 사람의 출생지나 혹은 그의 조상을 언급하여 그 사람을 소개하고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11절)”은 아주 일반적인 규정이었다. 그런데 갈릴릴 백성들과 예루살렘 백성들이 주님을 부르는 호칭이 왜 달랐을까?
 
갈릴리에서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정체성을 판단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바리새인들을 보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이들에 대한 반응은 냉담하셨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미 내부적으로는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지만, 합당한 명분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에 대한 정체성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는데, “선지자”로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이런 결정은 매우 의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메시아되신 분명한 증거들을 계속해서 보고 확인했음에도 이를 의도적으로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에게 주님은 메시아이어서는 안 되고, 선지자 정도면 충분하다고 결론 지은 것이다.
 
*결국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메시아되심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내려 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선지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이미 예루살렘 성 안의 백성들에게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알려 놓은 것이다.  
 
 
 
나는?
-나는 나의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고 나의 겉옷(전심 전력)을 펴며 뒤따르고 있을까?
 
-나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따르는가? 아니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만 여기는가? 나의 전 존재를 유일하게 구원하여 주실 유일한 구원자로 외치며 찬양하는가? 그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많은 선생들 중의 하나로 여기는가?
 
 
 
*주님, 주님만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렵니다
*주님,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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