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권위, 아버지와 두 아들….[마 21:23-32]
 – 2023년 03월 16일
– 2023년 03월 16일 –
본문에서부터 22장까지는 주님과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이 이어진다. 대제사장, 장로들,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 율법학자 등 이른바 종교지도자들이 총출동하여 다양한 주제로 주님을 공격하며 시험한다. 본문은 권위를 두고 주님과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논쟁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후 세 번째 사건이다. 이튿날 다시 성전을 찾으신 주님이 무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 종교지도자들과 권위에 대하여 설전을 펼친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라는 비유로 예수님의 권위와 그 출처를 강하게 부정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권위의 본질을 들춰내신다. 동시에 주님의 권위와 그 출처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세례 요한과 자신을 믿지 않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의 태도를 이 비유를 통해 고발하신 것이다.
 
 
 
1.권위에 대한 질문과 대화(23-27절)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메시아적인 권위를 전제한다. 명절 기간 성전 뜰 주위 주랑 아애 그늘에서 펼쳐지는 랍비들의 가르침은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어제 주님께서 행하신 충격적인 청소 장면과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신 소문으로 인해 주님의 가르침의 자리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바로 그 현장에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다가온 것이다. 그들의 발걸음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길을 터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언짢은 투로 묻는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런 일”은 어제 하루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또한 그들이 “이런 일”을 권위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권위는 자신들이 허락하지 않은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권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권위를 준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세는 자신들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에 자신들이 인정하거나 위임한 권위가 아니기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기인했을 거라고 당연하게 몰고 각 심산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되물으시며 그들에게 먼저 대답을 요청하셨다. 그들이 대답하면 주님께서도 답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되물으신 질문은 뜻밖에도 요한이 베푼 세례가 하나님이 주신 선지자적인 권위인지 요한 자신의 권위인지 였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마 3:7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처음부터 세례 요한에게 적대적이었다. 요한을 권위 있는 전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에게 참수를 당했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그의 죽음을 환영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세례 요한처럼 제거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마태는 이 장면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분주한 상황 판단을 예의 주시했다.  그들의 고민을 통찰력있게 표현하여 기록하였다. “….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무리가  무섭소. 그들은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새번역_25절 하-27절 상)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 하늘에게 보낸 참 선지자임을 인정하였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론이 악화 되는 것을 우려하여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알고도 아예 대답하기를 회피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도, 진리의 말씀도 믿지 않은 것이다. 그저 로마에 기댄 종교 권력만 의지할 뿐이었다. 
 
호기롭게 질문했지만, 당황한 기색 역력한 그들을 주님은 쉽게 돌려 보내시지 않는다. “나도 너희에게 답하지 않겠다”하신 후에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지신다.
 
 
 
2.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비유(28-32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28절)는 질문으로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으신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으시고 비유 하나를 들려 주신다. 마치 이 비유를 듣고 대답해 보라는 의미인듯 하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유대교의 거짓 권위와 예수님의 참 권위를 극명하게 대조한다.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첫 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령하였다. 아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가지 않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둘째에게도 똑같이 명령한다. 그는 일하기 싫다며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다. 하지만 잘못을 이내 뉘우치고 아버지가 시킨 일을 하러 포도원에 간다.
 
비유는 간결하나 강령한 인상을 준다. 주님께서는 이 두 아들중 누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느냐고 물으신다. 순종을 판단하는 기준은 말과 행동인데 두 아들은 이 기준에서 서로 엇갈린다. 겉으로 대답하는 것에 무게를 두느냐, 행동하는 것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후자에 무게를 두고 둘째 아들이 순종하였다고 대답한다. 주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충격적인 교훈을 선언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이 혐오하고 경멸하여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소외 시켰던 세리와 창녀들을 언급하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하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지킨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아버지의 명령에 “예”하고 그 뜻을 거스른 첫째 아들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요한이 “의의 도”로 세상에 왔지만 믿지 않았다. 또한 지금,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다.
 
*한편 세리와 창녀들은 비록 저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멀고 어긋나 있지만 요한의 세례를 믿었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우친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32절). “믿었으며”는 믿지 않았던 종교지도자들의 태도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뉘우치고 믿었던 세리와 창녀가 뉘우치지 않고 믿지 않았던 자들보다 앞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법이다.”  그들은 둘째 아들과 같다. 그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성전은 하난미을 찬양하는 어린이들, 고침 받은 병자들, 세리들과 창기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먼저 하나님을 믿었지만 죄악에서 끝내 돌이키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당시 유대의 사고방식은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분명해야 했다. 즉 어디에서 이런 일을 행할 자격을 얻었는지가 중요하다. 이렇게 질문은 받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자격을 증명하거나 입증해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그 사람의 일이 인정을 받는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해온 일이 정당하게 되었다. 만약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수치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해왔던 자신의 일이 모두 정당한 근거에서 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관습에 의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주님께서 성전에 가르치실 때 찾아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느냐?”고 묻는 물음은 주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가르치며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내는 모든 일의 정당한 근거였다.
 
-이를 본문에서 “권세(히_스마콧트, 헬_엑수시아)”라고 했다. 이 단어는 “누구에게서부터 받은 능력”을 가리킨다. 마치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근거를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 근거를 요구하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에게 이 근거를 보여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졌다”는 근거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껏 충분히 보여 주었고, 어제도 성전 뜰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치유하여 주시믕로 보여 주었지만, 그저 소동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한의 권위의 근거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물으신다. 왜냐하면 요한의 권위의 근거가 자신의 근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민끝에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근거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희가 모르겠다고 하면 나도 너희에게 대답하지 않겠다.”(27절)고 하셨다. 이 사건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수치당함으로 마무리된다.
 
 
*권위와 자격을 묻는 의도는 분명하다. 주님의 능력은 분명했고, 가르침은 흠잡을 데 없이 탁월했으나 막을 명분이 없었다. 날로 백성들의 지지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는 어느 정도 여론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유월절 기간 에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성전을 청결히 하며 그곳에서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치유하심으로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백성들이 확인하게 되었다. 그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을 무자격자로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자격을 먼저 논하는 것은 이미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이를 축복하며 격려해야 한다. 함께 힘을 모아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순종의 삶을 이뤄내는 것 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 그저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자.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을 바라보면서 권위에 집착하는 그들에게서 성전 주랑에 울려 퍼지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나라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권위의 자격이나 따지기 위해 백성들의 귀에는 들리는 하나님 나라 말씀이 그들에게는 들려지지 않는 다는 것이 개탄스럽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의 탐욕에 이끌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가장 끝까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살이 되기를 소원한다.
 
*포도원 주인과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포도원 일을 가겠다고 말하고 가지 않은 첫째 아들을 “종교지도자들”로, 싫다고 했다가 뉘우치고 일하러 간 둘째 아들을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을 알려 주신다. 이렇게 하여 뉘우친 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다고 대답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지 않은 자칭 의인의 나라가 아니라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의 것이다.
 
 
 
*주님, 늘 회개의 열매, 은혜를 갈급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권위보다 은혜, 겸손, 순종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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