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 농부들인지 다른 농부들인지….[마 21:33-46]
 – 2023년 03월 17일
– 2023년 03월 17일 –
주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의도를 아시고 포도원 비유를 통해 그들의 속내를 폭로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임할 심판과 주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신다. 주님을 고발할 꺼리를 찾고 있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데 세 가지의 천국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두 아들(21:18-31), 포도원을 세주고 타국에 간 주인과 농부들(21:33-44),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22:1-4)이다. 이 비유들은 모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1.포도원 농부들 비유(33-41절)
첫 번째 ‘아버지와 두 아들’ 비유를 통해 세리들과 창녀들이 종교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려주신 후 주님께서는 “다른 한 비유를 들어라(33절)”고 단호하게 명령하신다.
 
한 포도원 주인이 정성껏 포도원을 만들어 가꾸었지만 타국에 가야할 풀가피한 사정이 생겼다. 어떨 수 없이 주인은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났다.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 때 정성을 다했다.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 틀을 팠고, 망대를 세웠다(33절). 성실하게 일하며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였다.
 
통상 포도원을 개간하여 만들면 4~5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 기간을 주인이 성실하게 책임진 것이다. 지금껏 최선을 다해 살피고 농사했기 때문에 수확에 대한 기대감은 확실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가꾸었는데, 아무리 불가피한 상황에 타국으로 갈 일이 생겼지만,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살피고 살펴서 세를 맡겼을 것이다.
 
드디어 열매를 거둘 때가 다가왔고 주인은 종들을 보내 열매를 받아오게 했다(34절). 주인의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주인에게 보냄을 받은 종들은 주인의 대리인이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예상을 벗어난다. 주인의 기대와 정반대로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나머지 하나는 돌로 쳤다(35절).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낸다. 하지만 농부들은 동일하게 폭력을 행사하며 주인의 요청을 묵살한다(36절). 기막힐 노릇이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한다. 종들을 보내는 것과는 분명 다르게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과 다름없는 아들을 함부로 하지 않고 마땅히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7절). 하지만 농부들은 아들을 상속자로 알고 죽인다(38-39절). 그러면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되리라고 여긴 것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아들이 농부들의 손에 죽는 것에 있다. 주인의 기대는 종들이 두 차례 거절과 죽임을 당하면서 무너졌다. 그리고 세 번째 보낸 아들의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 주인은 그럴줄 몰랐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와 다른 점은 아들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알고 보내셨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아들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넘겨져 로마의 폭력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때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 물으신다. “과연 포도원 주인이 올 때 종과 아들을 죽인 농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40절) 그들은 주인이 와서 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신실한 농부들에게 맡길 것이라고 대답한다(41절).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조차도 “악하고 진멸 받아 마땅한 자들”인 농부들이 바로 자신들임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정한 셈이 되고 말았다.
 
 
 
2.너희는 빼앗길 하나님 나라(42-46절)
그들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 악한 농부들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의 비유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역이 진행되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따로 비유를 해석해 주셨다.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깨닫는 것이 허락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깨닫지 못한 채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해 주신다. 그럼에도 더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직접 비유를 들려 주시고 해석까지 해 주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눈과 귀가 멀어 있다. 주님의 비유는 이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더 크고 확실한 심판이 된다.
 
주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잘 아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신다. 돌이 버려지듯 아들이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을 가장 중요한 돌로 삼듯이 아버지는 반드시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악한 농부들의 목적이 달성되게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하신다. 포도원과 하나님 나라, 악한 농부와 ‘너희”, 열매 맺는 백성과 다른 농부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체적으로 이어가며 예언하신다.
 
그 날이 되면 돌 위에 떨어지는 것은 모두 깨지고 돌이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주님께서 들려 주신 경고와 비유에 이은 해석까지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이전과 달리 그제서야 악한 농부들이 자신들을 두고 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45절). 하지만 회개나 반성은 없었다. 오히려 분노에 가득차서 주님을 잡으려고 한다.
 
*기가 막힌다. 비유를 듣고 오히려 악한 농부와 같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한편 주님의 비유를 듣고 가장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선명하게 공개되었다. 농부들은 마땅히 포도원을 맡긴 주인을 가장 존대하고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소요가 두려워 주님에 대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나는?
-이스라엘은 주인을 배반한 농부들처럼 자신들을 정성껏 키워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다. 하나님의 줄기찬 용서와 사랑 앞에 그들은 불순종과 선지자들을 죽이는 악행으로 보답했다.
 
-이사야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다보기라도 하듯,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랬지만 들포도만 맺음으로 심판을 경고받은 포도원(이스라엘)을 떠올리는 말씀이다(사 5:1-7).
 
 
-농부들은 아들이 죽으면 소유자가 토지를 갖게 된다는 당시 풍습을 염두하여 아들을 죽이고 만다. 주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이 비유를 막힘 없이 들러 주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대답하였다(41절).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악한 자들을 철저하게 심판 받는다. 하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비유의 참 뜻을 깨달았지만 회개 하기는 커녕 주님을 잡으려고 계속 시도한다. 그러나 주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이 무서워서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고 있지만 점점 악하고 교묘하게 주님을 죽이려는 계략을 진행 할 것이다.
 
 
*주님의 비유의 강도가 더 세졌다. 잔인하고 악한 농부들을 빗대어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다. 잠시 맡겨진(세를 받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권위를 영원하고 강력한 것처럼 행사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무지몽매함이 낯설지 않다. 정치, 행정, 사법체계에서 책망받은 종교지도자들처럼 행동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오늘 말씀은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는 물음이 묵직하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쉽게 대답한다. “그 악한 잗ㄹ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절)”
 
*기막힌 정답이다. 주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답을 말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기막히도록 더 안타까운 것은 정답을 아는 것과 정답대로 행하는 삶은 별개였다는 점이다. 누구라도 지식적으로는 정답을 쉽게 말한다. 그런데 자신이 말한 정답대로 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지 않으면 정답을 말하지만 오답의 행동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이다.
 
*본문 속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보이는 “내로남불”, “안하무인”, “절대착각”은 비단 저들의 모습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지나친 자기 확신과 자기 주관의 견고함은 절대 객관화처럼 말하는 절대 주관화의 삶을 살기 마련이다. 자기는 객관적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너무도 주관적이다. 에휴….. 이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의 거울 앞에, 생동력있는 말씀의 운행하심 속에서 나의 경험, 나의 생각, 나의 지식, 나의 확신이 마치 모두를 위한 객관적인 것이다 라고 착각하게 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비춰주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주님의 마음과 생각에 더욱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기 신학이 절대 진리인양, 자신의 신앙이 절대 가치인양 착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요지경 속인 것을 이제는 세상이 더 잘 안다.
 
 
*종교 지도자들의 대답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처방임을 곧 꺠닫게 된다. 그러면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야 하는데, 그들은 더욱 악해졌다.
 
*그들의 대답 속에서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주면 해결될 것이라는 말은 오늘날 나에게도 해당된다. 본문에서는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화된 낡은 유대 신앙이 새로운 나라, 곧 자신의 몸을 성전 삼아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맡겨져 세워질 것을 내다보게 하셨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이 나라와 은혜 안에 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를 점검해야 한다. “내가 그 농부들인지, 다른 농부인지” 말이다.
 
 
 
 
*주님, 하나님 나라를 빼앗길 어리석은 종교 지도자들과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 포도원 경작을 빼앗길 그 농부들이 아니라 새로 맡겨질 그 농부들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교회를) 잘 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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