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무나 누구든지, 그러나 예복을 입어야만…[마 22:1-14]
 – 2023년 03월 18일
– 2023년 03월 18일 –
21~22장에서 세 번째 비유인 “혼인 잔치 비유”이다. 메시아가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 주신다. 하나님 나라에 초대 받은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세 가지 비유은 주인, 농부, 임금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이 주인공이다. 분문의 하나님 나라는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혼인잔치)로 사람들을 초대 하였지만 그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오기 싫어했다. 세 번째 비유도 역시 “권위”를 거절한 것이 초점이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누가 이런 초청을 거절한 이들일까? 왕이 모든 절차와 예식을 갖춰 초청을 했기에 분명 특권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를 거절한 것이다. 왕의 권위에 도전한 그들의 운명은 비참했다. 그들은 먼저 된 자들이며, 세상에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잡은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임금이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음으로 오라고 하여도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 자기 일을 하러 간다. 또 일부는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인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른다.
 
 
 
*하나님은 소와 살진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과 흥겨움이 있는 혼인 잔치와 같이 풍성함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신다(1-6절).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마다 선지자들(종들)을 통해 초대장을 전하셨고, 지금도 말씀을 통해 이 다함 없는 부요와 희락이 넘치는 교제로 우리를 부르셨다. 나는 하나님 나라 잔치를 사모하고 또 누리고 있을까?
 
*왕의 초대를 소홀히 여긴 자들은 왕이 심판한다(7절). 이는 예수님을 죽이고 그를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동네(예루살렘)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다. 그렇기에 나도 역시 날마다 말씀을 통해 보내 주시는 하나님 나라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최초로 초청 받은 자들이 왕의 초청을 모두 거절한 결과 모든 것을 상실했다. 하지만 혼인잔치는 취소되지 않았다. 왕은 종들을 통해 누군가를 다시 초청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을 다시 초청할 시간적인 여건과 상황이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왕은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잔치에 초대하게 한다.
 
최초 특권층에게 허락된 영광의 잔치가 이제는 모두에게 열린 것이다. 왕의 초청에 순종하는 자들마다 모두 왕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악한 자나 선한 자가 차별없이 모두가 기회를 얻는다. 왕의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했다(8-10절).
 
 
 
그런데 왕의 초청이 무조건에다, 무차별적이었기에 초대받은 자가 스스로 갖추어야 할 자격이나 조건은 없었다. 그러나 왕궁의 잔치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있었다. 바로 예복을 갖춰 입는 것이었다. 왕은 잔치에 참여된 이들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한다.
 
왕이 베푸는 혼인 잔치에 초청되어 그 잔치에 들어갈 때 예복을 착용하는 것이 유일한 기준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비유에서 “예복”은 무엇일까?
 
상당히 난해 할 수 있지만, 비유의 흐름 속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먼저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라는 것을 초대 받을 때 분명하게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고 가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지금 소개 되고 있는 세 비유가 모두 “권위”라는 주제로 통일 되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왕이 마련한 잔치에 참여 하는 것은 이에 마땅하고 합당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왕의 권위에 대한 최소한의 자세는 잔치에 갈맞는 예복이었다. 그것이 “아무나, 누구든지” 초청받아 참여한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처음 초청 받았으나 부당하게 외면한 이들과 동일한 부류가 되고,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한 자는 초청을 거절한 사람과 똑같은 취급을 당한다. 이는 왕과 잔치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거듭 혼인 잔치에 초대하였지만 밭일과 장사를 핑계로 거절하고 심지어 초대장을 전한 종들마저 모욕하고 죽인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도 이와 같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것을 거절하였고 기회를 잃어버렸다. 혹시 주님과 교제하는 초청에 응하지 않고 미루고 있지 않을까? *주님과 교제하는 초청에 기억하지 않고 미루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다. 유대인들이 그랬다.
 
-무엇보다 왕의 초청은 청한 자들에게 종들을 보내고, 거절한 그들에게 다시 종들을 보내는 세 번에 걸쳐 이루어 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거절한다. 밭과 일이라는 지금 자신의 일에 더 가치를 두고 거절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가?
 
 
-종교지도자들이 성전에서의 일을 문제 삼아 주님의 권위에 대하여 문제 삼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주님의 비유는 점점 난해해 졌다. 세 번째 비유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비유를 든 것이다. 어느 누가 왕의 초대를 거절하겠는가! 그래서 비유의 초점은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처럼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초대받은 신하들의 행동에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왕의 초대를 거절한 이들이다. 그들은 성전에 기대어 조상 대대로 자기 삶을 유지한 특권층들이다. 전통과 제도라는 막강한 시스템 속에서 잇속을 챙겨 온 이들이다. 당연히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 새로운 질서 특히 그동안 모형으로 존재한 성전이 무너지고 참 성전되신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로운 하나님 나라 질서는 받아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누려온 기득권을 앞으로도 자자손손 누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주님의 권위를 거부한 이들에게는 진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준은 사라졌다. “아무나” 참석할 수 있다. 누구나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혹은 은총”이라고 한다. 특정한 몇몇 사람만이 아닌 누구나 보편적 구원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올 수 있다고 해서 누구든지 환대받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조건, “예복”을 입는 것이다. 예복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최선과 최소의 반응이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아무나 잔치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쫓겨났다.
 
*악한 자가 예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복을 거부하는 자가 악한 자이다.
 
*”아무나, 누구든지” 속에 내가 있어 감사하다. 그러나 “예복”을 갖춰 입는 것이 “아무나, 누구든지” 참여 가능한 왕의 잔치에 합당한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예복은 왕의 권위에 대한 최소한의 반응이다.
 
 
 
*주님, 아무나, 누구든지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안에 내가 속해 있음이 은혜입니다.
*주님, 하나님 앞에 늘 예수 그리스도 라는 예복을 입겠습니다. 이 예뽁 없이는 설 수 없는 자리임을 압니다. 저에게 이 예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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