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마 22:15-22]
 – 2023년 03월 19일
– 2023년 03월 19일 –
주님께서 세 가지의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율밥학자의 질문들이 이어진다. 이들은 주님에게서 “말의 올무”를 잡기 위해 각각 자신들의 입장에서 질문하며 주님을 시험한다. 본문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야합하여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을 했다.
 
 
1.야합과 합종연횡(15-16절)
바리새인은 매우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로마의 통치 행위를 사사건건 트집 잡았다. 그런데 헤롯당은 헤롯 가문을 추종하는 정치적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자연스레 친로마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서로 질시하고 앙숙관계였지만 주님을 곤경에 빠뜨려 제거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사상과 가치가 달라도 야합하고, 합종연횡하는 행태를 기꺼이 보인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은 이해관계를 따라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늘 같은 편이 된다. 야고보 사도가 세상과 친구하면서 하나님과 벗이 될 수 없다고(약 4:4) 말한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속내를 감춘 채 야비한 말, 진심이 없는 포장된 말로 주님을 치켜 세우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환심을 사고 자신들이 준비한 치명적인 말로 주님을 무너뜨릴 심산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준비한 회심의 카드는 결국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이중적인 삶을 드러내고 만다.
 
*악한 힘을 더욱 악한 의도를 가지고 발악을 하며 휘두르는 꼴이다. 하지만 제 풀에 넘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멀지 않았다.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치켜 세운 말이 그들의 속내를 선명하게 드러냈듯 나의 언행도 주님 앞에서 이렇게 드러날 것을 알고 더욱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함을 느낀다.
 
 
 
2.치졸하고 악한 질문, 지혜롭고 놀라운 대답(17-22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주님에게서 고소할 빌미를 잡아내기 위해 가장 민감한 세금 문제로 주님을 시험한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며 떠오르는 것이지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셨던 주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는 마귀였고, 지금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이다. 그들이 준비한 질문은 그야말로 기막힌 것이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새번역_17절) 주님의 이들의 질문을 들으시고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8절)고 말씀 하신다.
 
그리고는 세금으로 낼 돈을 보이라고 하셨다(19절).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제국에 납부했던 세금 중 “인두세”가 한 데나리온이었다. 심지어 종에게까지 부과했던 보편적인 세금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건네받은 데나리온 동전을 들고 물어보신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_새번역)”
 
 
*먼저 생각이 머무는 지점은 주님께서 세금으로 낼 동전을 요구하실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데나리온을 꺼내 보여주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경멸하지만, 동시에 새상이 주는 편리함과 부함을 쫓는 이중적인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킨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눈 앞에서만 경건한 척 한 것은 아닐까?
 
당시 인두세 세금으로 납부하던 로마의 동전은 데나리온이다. 앞면에는 티베리우스 초상이 귓면에는 그의 어머니이자 평화의 여신으로 인정되는 황후 리비아가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데나리온 동전 앞면 티베리우스 초상이 새겨진 내용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신의 아들 황제 티베리우스)”라고 기록되어 있다. 뒷면 실비아의 모습은 몸 전체가 보이고 폰티팍스(로마의 최고 사제)라고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과 글은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평화의 여신 리비아이다. 황제를 신격화 하고 있고 로마의 힘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 주님께서는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 것인지 물으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흔히 본문을 세금과 헌금에 대한 구별로만 보는 경향이 뚜렷 했었다. 주님께서 올무에 잡힐만한 질문에 그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현명한 대답을 하신 지혜로운 분이시다 라는 정도만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굳이 주님께서 “이 형상과 이 글은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셨을까?
 
또 21절의 한글 번역은 이러한 인식을 갖기에 충분한 의도로 읽혀지는 번역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 접속사 “카이”가 번역이 되지 않았다. 이를 번역하여 직역하면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가 된다. 단지 가이사에게 바칠 세금은 가이사에게 하나님께 드릴 헌금은 하나님에게 바치면 된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인 해석에 그치는 의미가 아니다.
 
*접속사 “카이”는 그리고 혹은 그러나로 번역된다. 문맥의 흐름상 “그리고”로 번역할 수 없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번역을 하게 되면 앞의 내용을 전체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되받아 던진 질문인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20절)의 대답인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글을 소유한 이는 하나님께 전 삶을 드리라는 의미가 된다.
 
단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 왕조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가 아닌 하난미의 백성된 이스라엘이 지금 제대로 감당하고 있지 못한 전 존재를 하나님의 것으로, 전 삶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무겁게 경고 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 권력을 다스리는 권력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가이사에게 권력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금을 바치는 것은 가하지만 하나님을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으로 그 통치권을 인정할 때에만 그 행동이 의미가 있다.
 
*가이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기에, 인간 권력에 대한 의무를 충실하게 하되 진정한 이 땅의 통치자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이를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라는 체계 안에서 의무로 지켜야 할 온갖 법규에 대하여 이를 잘 지키는 것이 곧 이 체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법을 잘 준수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법의 체계를 존중하고 준수해야 한다.
 
*단,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벗어난 것은 단호하게 배격하고 지도자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감시자 역할도 꼼꼼하게 감당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심을 온갖 불법과 무지와 전회을 일삼는 지도자를 무조건 지지하는 어리석음 팔면 안 된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이 땅에 드러낼 때 세상 지도자들과 다름없는 모습과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담대하게 지켜 나갈 수 있기 떄문이다. 때로 과격한 투쟁으로, 때로 순순히 감당함으로 마땅히 지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실망이 되어 버린 듯 해서 참담하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오롯이 드러내고 영향력을 끼쳐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말씀의 선한 영향력이 아니라 실망과 절망의 영향력이라니….
 
 
 
 
*주님,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 담긴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단지 세금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놀라운 결단을 요구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허락해 주신 국가 제도에 잘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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