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가장 큰 계명_사랑, 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행함[마 22:34-46]
 – 2023년 03월 21일
– 2023년 03월 21일 –
다시 바리새인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한 율법사가 시험을 목적으로 주님께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 묻는다. 주님은 성경을 인용하시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등한 비중으로 가장 큰 계명이라고 소개하신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신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답에 다시 성경을 인용하시며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일깨우신다.
 
 
 
1.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34-40절)
23절부터 시작된 주님의 권위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도전이 끝나간다. 주님과 종교지도자들의 갈등은 대화가 오갈 수록 골이 깊어져 간다. 그들은 주님을 시험에 빠뜨리려고 했지만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면 그들의 탐욕과 외식이 주님으로 인해 백성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감히 주님께 묻는 자가 더 없었다(46절).
 
사두개인들이 주님의 가르침 앞에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것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 모여 들었다(34절). 평소에는 사두개인들 그리 협력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주님을 죽이기 위해 공동으로 대응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들 중의 한 율법사가 주님을 역시 “시험”하여 묻는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절)”  이 질문도 주님께 수모를 안기기 위해 계획된 질문이었다. 주님께로 돌아선 민심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함께 공동대응 해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계명(613개)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주님은 앞선 질문과 달리 즉시 대답해 주신다.
 
주님께서 생각하신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5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 목숨, 뜻”은 전인적 헌신이 나타나는 사랑을 가리킨다. 또 이웃 사랑에 대하여는 이미 레 19:18에 등장하고 주님께서 이미  산상수훈에서 다루셨다(5:43-47; 19:19). 주님은 이웃 사랑의 계명이 다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실천으로만 제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웃 사랑을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확장하시고 주님께서 직접 이를 보여 주실 것이다.
 
이웃 사랑은 본래 첫 계명인 하나님 사랑 안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을 닮은 삶의 방식으로 주어진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귀결 된다. 이 두 계명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웃’의 범위를 매우 좁혀서 사랑의 대상을 ‘동족 유대인’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수’까지 확장하신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 사랑의 범위를 무한대로 넓힌 것이다. 이는 곧 종교지도자들이 정한 사랑의 범위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습과 앞으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모습을 따라가야 함을 뜻한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방식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 있을까! 물론이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다. 장차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원수를 위해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 주신 아들 예수의 사랑이 그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 사랑을 보게 된다.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 하늘 공동체의 삶이다. 세상은 하늘 공동체의 이웃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본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40절)이다.
 
 
“강령(크레만뉘미)”은 “매달다(hang), 의존하다”라는 의미이다.  40절 말씀을 직역하면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  계명에 매달리느니라(의존하느니라)”이다. 이것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들 곧 모든 성경이 이 두 계명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짝이 경첩에 매달려 있는 것 처럼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매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각각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된 계명이다. 분리할 수 없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듯이 사랑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사랑을 반드시 수반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적인 선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헌신과 순종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적인 활동들(예배, 헌금, 기도, 묵상, 필사, 전도 등등)에 매우 헌신하면서도 정작 교회 안이나 주변의 이웃을 위한 나눔과 섬김에는 무관심하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사랑은 이웃을 향한 수평적인 사랑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
 
 
 
2.주님의 질문(41-16절)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신 후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셔서 대뜸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42절)”고 물으신다. 바리새인들은 주저함 없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무리들이 외치고 성전에서 어린아이들이 외친 외침들이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가르치신다. 이를 위해 시편 110:1을 인용하신다. 이 구절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부분이다. 주님께서는 그 다윗의 예언에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부분에 주목하셨다. 다윗이 표현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주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내 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이다. 그런데 다윗이 “내 주”라고 칭한 것을 근거로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칭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 맞지만 그가 가진 지위와 권세는 이미 다윗을 뛰어넘는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신다.
 
마 21:23에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며 누가 그 권위를 주었느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자리에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본문 결론부에서 간접적으로 이에 대한 해답을 부어 주셨다. 주님의 권세는 하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곧 메시아이시다.
 
 
 
나는?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아는 지식보다,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그 계명을 살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삶으로 잃혀지지 않는 말씀은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종교지도자들이 계명을 몰라서가 아니라 계명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부활 논쟁에서 사두개인들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29절).
 
-말씀 앞에 서는 것,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말씀을 깊이 생각하되 나의 기준과 이해가 아니라 말씀에서 주시는 이해를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잘 드러내야 하는데, 삶을 통해 증명되기 때문이다. 곧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정죄와 판단, 격리와 소외보다 품고 품는다. 기다려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스스로 하나님을 소외시키지(멀리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편안하다. 우리의 문제는 사랑하는 것에 어색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 품성이시다. 우리가 그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낳은 새로운 삶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면 사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사탄은 사랑하지 않도록,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분별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마음밭에 뿌려 놓았다. 지금 우리의 마음 밭에 사랑과 미움이 뿌리가 얽혀 함께 자라고 있다.
 
-그러므로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순종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함께 가는 것이기에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면, 삶의 현장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의지적인 순종이 일어나야 한다.
 
 
*지식이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려고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받았다. 성령께서 이 사랑에 반응하고 순종하도록 감동 주실 때 의지적으로 순종하며 나가야 한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의지에 힘을 불어 넣어 주신다. 사랑하며 살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자신들의 지식에 교만함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다가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 아… 이 말씀은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교만하지 않기를 다짐해본다. 더 배우고 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지…
 
 
 
*주님,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알고 있는 지식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알고 있는 지식에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겸손하게 더 배우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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