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마 25:31-46]
 – 2023년 03월 30일
– 2023년 03월 30일 –
주님의 재림 이후 있을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해 주신다. 인자가 영광 가운데 천사와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 모든 민족이 인자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고 준엄한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오른편의 의인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왼편의 악인들에게는 책망과 영원한 형벌이 주어진다. 이 심판의 기준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른 것이었다.
 
 
 
1.심판(31-33절)
앞서 등장한 비유들은 모두 “인자의 때”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본문의 심판을 준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고 나면 곧바로 모든 민족을 향한 인자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진다. 그 날에 인자 앞에 선 모든 자들은 의인과 악인으로 완전히 구분되 이에 따른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는다.
 
주님께서 직접 마지막 재림의 때에 자신이 행할 일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중에 이미 예루살렘 입성중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19:28)” 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16:27)” 라고도 말씀하셨었다. 이 두 모습이 온전히 이루어 지는 때가 바로 재림의 때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구의 앞에 불러 모으신다. 각각 “목자가 양을 구분하는 것 같이”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편으로 구분하신다. 목자가 양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일반인의 눈으로 양과 염소를 구별하기 쉽지않고 숙련된 목자라야 실수하지 않고 구분할 수 있듯이 주님의 눈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의인과 악인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하신다는 의미이다.
 
오른쪽과 왼쪽의 구분은(분리는) 심판 선언을 위한 준비이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구분(분리) 하신다. 당연히 양은 의로운 자를, 염소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
 
*진정한 문제는 이 구분이 철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정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없다. 주님께서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능숙하고, 확실하며, 틀림없이 구분하신다.
 
 
 
2.오른편, 의인들을 향한 임금의 선포와 반응(34-40절)
임금이라는 칭호는 심판자에게 어울리는 칭호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 아버지’라고 표현함으로서 심판의 자리에 있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다.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복을 받을 자들(34절)”이라고 선언하신다. 모든 민족을 인자 앞에 끌어 모은 목적은 “복 주시기 위해서” 였다. 그 복은 “창세부터 예비된 나라의 상속”이다.
 
이렇게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는 이들이 이 땅에서 행한 일들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만 한 것일까?
 
본문의 임금은 여섯 가지로 그 행실을 나열한다.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고통당하는 대상을 향한 따뜻한 돌봄과 섬김”이다. 오른편의 의인들은 고통당하는 이들이 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았다고 말한다(35-36절). 그리고 임금 자신이 그 돌봄을 받은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의인들을 놀랐다. 그들이 섬긴 이들은 임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그리했습니까?(37-39절)”라고 되묻기 까지 했다. 의인들은 절박함에 처한 이들을 도울 때 그가 임금이라고 생각하고 도운 것이 아니었다.
 
*현실 속에서 곤고한 자들의 작은 필요들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40절)”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렇다면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일까? 모든 의인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모든 성도와 제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 되고, 헐벗고, 벙들고, 옥에 갇힌 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이었다. 주님의 형제들이었다.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주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의 고통이었고, 그들이 받은 작은 섬김이 곧 자신을 위한 섬김이라는 점이다. 제자들과 끝까지 동행 하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마 28:20).
 
 
*창세로부터 예정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이들은 예배를 잘 드린 종교인들이 아니었다. 주님을 입히고 먹이고 돌본 사람들이었다. 감격스러운 것은 주님에게 직접 하지 않았을 지라도 사회적인 약자인 소자를 입히고 먹이고 돌보았다면 그것을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간주 하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손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이웃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소자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동일시 하셨다. “이(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표현 못하네”
 
 
 
3.왼편을 향한 임금의 최후의 심판(41-46절)
임금은 왼편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41절)이라고 부르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님의 재림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나를 떠나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의인들에게 상속받을 나라가 창세로부터 예비되어 있듯이 악인들에게도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 받게 될 근거는 “이 땅에서 그들이 보여준 행실”이다. 의인들을 인정한 여섯 가지 상황이 똑같이 적용된다. 그 상황에서 악인들은 곤란에 처한 자를 돌보지 않았다. 임금은 동일하게 그 상황에 처한 것이 자신이었다며 그들의 외면을 지적했다. 그런데 임금의 판결을 듣고 악인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44절)며 항변하지만 변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본 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었지 임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의인들에게도 동일한 상황이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지극히 작은 소자”라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돕느냐 돕지 않느냐의 차이이며, 이는 주님의 제자들이 하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 땅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제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악인은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았을 뿐이었다.
 
임금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45절)” 이라고 말하며 악인들의 입을 막는다. 의인들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40절)”이라고 선언하셨던 내용과 반대로 선언하심으로 악인들이 할 말이 없게 만드신 것이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스스로 선택하여 주님의 이름을 행하는 것에 익숙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작은 자”들에게는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취향에 따라 선택하여 “행함과 하지 않음”을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순종해야 할 제자의 삶과 결이 다른 길이다.
 
악인들은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영벌을 의인들은 영생을 받는다.(46절)
 
 
 
나는?
-선행과 악행의 크기나 정도가 심판의 근거가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착한 행실로 재림을 준비했느냐가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결적적인 열쇠였다.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선한 행실을 살아야 할 이유다 분명하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줄곧 자신이 목자되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아 되심을 증거해 오셨다. 주님은 재림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에 심판이 있고 그 때에는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을 따라 분명하게 두 부류로 나누어 질 것을 실제적인 비유를 통해 알려 주셨다. 양과 염소, 오른편과 왼편은 의인과 악인, 명예와 불명예, 긍정과 부정의 의미로 대비하여 사용되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설 모든 민족들을 선명하게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을 준비하는 삶은 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일상에서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소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삶의 현장은 사소한 것, 작은 것,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소소한 관계에서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염세적이거나 종말론적인 것의 의미가 결코 현실 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이라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더 책임감 있게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내야 한다는 목적이 주어진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고(구원하여 죄인에서 의인으로 새롭게 하여 주셨고),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각각의 능력대로” 다라란트를 맡겨 주셨으며, 주님의 즐거움을 천상의 피상의 세계가 아닌 이 땅의 현실의 세계에서 누리도록 동참케 하셨다. 이와같이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충분한 은혜와 능력을 주셨다.
 
-이와같이 일상에서 성실하고 이낸하며 살아냈느냐를 판단하는 심판이 주님의 재림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종하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지극히 작은 자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돕는 선한 삶을 살아낸 이들을 위해 “창세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영생)”을 상속받게 하실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일까?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 이웃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기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다. 제자들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다. 물론 이 세상 속의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환난과 핍박을 앞에 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제자의 길을 가는 이들을 위해 교회가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지 교훈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고통받고 핍박 받는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그런 핍박에 노출 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임에도 돕는 그 행실을 가리킨다. 이것이 “주여 주여만 하는 자가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내는 삶이다.
 
 
*주위에 혹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지금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이며,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이”들이 있는가? 그들을 돕는 작은 마음이 곧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낸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유학생들을 위해 나의 옷을 기증하고, 그들의 필요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지의 선교사님들을 위해 헌금을 하고,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격려하는 것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오른편, 의인의 자리로 안내 받게 할 것이다.
 
 
*한편 본문의 악인들은 분명히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핍박과 순교의 시대를 감내해야 할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비리비재하게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과연 나는 의인들처럼 고통과 어려움 당하는 주님의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재물, 정성과 마음을 나눌 의지를 주님 다시 오실때 까지 꾸준하게 이어갈 수 있을까?
 
*더온누리 공동체 안에 지극히 작은 이들이 눈이 띄지 않지만 분명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눈에 띄게 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과 뜻대로 섬기는 삶을 순종하리라. 이렇게 하루 하루를 채워야 할 분명한 이유는 영생과 영벌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고상한 어떤 이유를 찾기 보다 그저 창세로부터 약속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무디어 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주님께서는 종말의 시대가 보이는 혼란함을 재림하셔서 단순하고 분명하게 정리하시고 질서를 회복하실 것이다. 세상은 그 때까지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고 선과 악이 혼합되어 있어 악인이 더 형통한 경우가 많고 의인이 악인에게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날 것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뒤바껴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때문에라도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심판의 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질서있는 세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최종 승리이며,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낸 주님의 제자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날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하루 하루 살아낼 일이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의인과 악인들 모두 자신들이 받는 상과 저주의 이유를 몰라 한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이유를 듣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고 반문한다. 그 정도로 일상에서의 주님 닮은 성품과 자연스러운 선한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특별한 일들을 해 낸 것이 심판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직접 밝히신 근거는 “무시해도 아무렇지 않을 보잘 것 없는 제자들(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섬김(태도)” 였다. 주님은 그런 연약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시며 이들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강조 하신다(40절).
 
 
 
 
*주님, 주님의 가르침 기억하여 공동체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 거두지 않겠습니다.
*주님, 복음을 위해 기꺼이 핍박을 당하는 이들을 향한 마음과 행동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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