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는 어느 자리에?[마 26:1-16]
 – 2023년 03월 31일
– 2023년 03월 31일 –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죽일 간계를 꾸미고 베다니의 한 여인은 향유 옥합을 깨뜨린다. 제자들은 그녀 행동을 꾸짖고, 주님께서는 이 일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종교지도자들과 주님을 넘기는 흥정을 한다.
 
본문부터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기사가 진행된다. 종교지도자들의 간계 모의와 가룟 유다의 배신 사이에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사건을 배치하여 특별한 메세지를 바라보게 한다.
 
 
 
1.수난예고와 종교지도자들의 모의(1-5절)
주님께서는 앞서 예고하신 유월절 수난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난을 예고하신다(2절).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동시에 이 말씀을 하시는 그때에 종교지도자들은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었다(4절). 하지만 유월절 기간이어서 민란이 날까 두려우니 진행하지 말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5절).
 
주님께서는 유월절이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해 죽음에 까지 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이 우리를 살리셨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님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허물어 뜨리는 원수일 뿐이다. 그들에게 개혁, 변화와 같은 단어는 정치적인 구호일 뿐, 실제적이지 않았다. 진리보다 기존 질서에서의 특권을 더 중요하게 여긴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님은 심각한 위협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서로 모여 주님을 잡아 죽일 간계를 꾸민 것이다.
 
 
 
2.항유를 부은 여인(6-13절)
예루살렘 지척의 베다니라는 마을의(예루살렘에서 4km 떨어진 마을) 시몬의 집에서 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시몬을 나병환자라고 표현 하는 것으로 보아 나병환자 였다가 완치된 사람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는 남녀 공간의 구분이 엄격했다. 그런데 남자들만 식사하는 자리에 여인이 들어온다는 전통적으로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이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예수의 머리 위에 부었다. 충격에서 충격이 연이어진다.
 
제자들은 분노하였다. 무슨 의도로 그 귀한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꾸짖기까지 했다. 제자들이 이렇게 까지 한 것은 여인이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행위는 아무런 유익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저 귀한 향유가 바닥으로 흘러 내려간 낭비였기에 화를 낸 것이다. 바닥으로 흘러내린 가치는 가난한 자들을 충분히 도울 수 있는 돈이었음을 상기 시키며 화를 냈다.
 
제자들은 향유가 타고 흘러 내려간 주님의 머리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들이 계산한 논리대로 평가한다. 그 정도의 가치라면 가난한 자들을 충분히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이 책망한 이유를 덧댄다.
 
*명절이 되면 누구나 평소 잊고 지냈던 자선을 하기 마련이다. 제자들도 그랬었을 듯하다. 무엇보다 누구보다도 스승 예수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볼 것을 수차례 걸쳐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비난 속에서 이 여인을 변호해 주신다.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녀가 한 일은 매우 가치있는 일임을 일깨우신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제한된 시간만 이땅에 거하시기에 떠날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 왔다. (물론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지만)
 
*여인의 행동은 낭비가 아니라 가치있는 일 이었다. 주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게 좋은 일”은 주님의 장례를 위한 일이다. 살아계신 주님에게 향유를 부어 장례를 예비하였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바로 직전에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워렂ㄹ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2절)” 고 말씀하셨었다.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제자들이 했어야 할 장례 준비였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실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값비싼 향유였지만 주님을 위해 부어 드리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주님은 여인의 이런 행동이 자신의 장례를 위해 부은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 일은 기억되어 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헌신에도 때와 기한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 누군가의 헌신과 감사의 고백이 나의 판단과 기준으로는 낭비처럼 보이는 경우도 꽤 있었음을 깨닫는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제자들처럼 그 값어치를 비교하고 계산까지 한다.
 
*이것은 헌신하고 섬기고 고백하는 것의 때와 우선순위를 착각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한 사랑과 헌신은 때와 기한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행동이다. 동시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 베푸신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큰 진에 대해 여전히 제대로 모르고 있기에 다른 이들이 행동하는 헌신에 대하여 나는 행하지 않고 그저 판단만 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주님께서 나를 ㅜ이해 행하신 계산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이 나를 하나님 나라 백성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드리고자 할 때 아깝지 않아야 한다.
 
*계산하고 아까워하고 다른 것과 비교하고 말만 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 씁쓸하기만 하다.
 
 
 
3.가룟 유다의 배신(14-16절)
가룟 유다는 주님에게서 그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듣고 가장 가까이서 주님을 따랐던 열 둘 중의 한 사람이다. 제자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했을 만큼 신뢰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에 팔려고 한다. 왜 그럴까?
 
또, 마태는 한 여인의 충격적인 헌신에 반응하는 제자들의 반응에 이어 가룟 유다의 배신을 배치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그릇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자들의 주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반응을 잘 보여주는 이가 가룟 유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화상이었다.
 
가룟유다는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랐지만, 자신이 가진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삶의 존재 이유, 신념, 가치관, 세계관 등 모든 것이 주님과 함께 하며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자신의 기대와 신념대로 행하지 않는 주님을 팔아 넘김으로 그동안 자신의 삶의 방식과 신념들을 지키려고 했다. 즉, 주님께서 도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자신의 신념과 비교하여 전면 부정하고 아예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주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소망이 주님을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에서든지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간계를 모의한 종교지도자들의 이야기도, 주님을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하여 제자 였음에도 팔아 넘긴 가룟 유다의 이야기도 늘 전해 질 것이다.
 
-마태가 이렇게 주님에 대하여 상반되게 반응하는 종교지도자들, 베다니의 한 여인, 제자 가룟 유다의 모습을 나란히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마태는 왜 이렇게 했을까?
 
-그것은 나는 지금 이느 자리, 어느 곳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되돌아 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주님을 간계(흉계)로 잡아 죽일 모의를 하는 모임에,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가장 값진 향유를 기꺼이 내어 드린 여인, 그런 여인을 하나같이 비난만 하는 제자들, 복음을 전해 들으며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하는 자리,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아 넘기려는 언제라도 주님을 넘기려고 하는 그 자리….. 이렇게 다양한 자리들 중에 나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되돌아 보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특정 모임을 통해 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따돌리기 위해 모의했던 자리가 없었을까? 다른 이들의 헌신을 바라보며 계산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왜 이렇게 낯설지 않을까? 나의 생각과 가치,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 하여 주님의 일이지만 반대한 적이 과연 없었을까? 단지 반대만이 아니라 방해하고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과 연대하지는 않았을까?
 
*반면 베다니의 한 여인처럼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를 구원하여 주신 그 사랑에 반응하기를 내가 가지 가장 귀한 것이라도 전혀 아깝지 않을만큼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 드린 “나의 향유 옥합”이 있었던가?
 
 
*과거의 나의 행적들이 어떤 것이든, 어느 자리에 있었든지 지금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마태가 종교 지도자들의 모의, 한 여인의 헌신, 제자들의 반응, 가룟 유다의 배신을 연이어 배치하며 우리 자신들에게 스스로 자문자답 해볼 것을 요청하는 아침이다…..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을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로(요 12:1-11),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할 때 다가온 죄 많은 여인으로(눅 7:36-50),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동일하게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다가온 한 여인으로(막 14:3-9)로 각각 소개한다. 상이점이 있지만 이 모습을 읽는 우리에게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주신다.
 
*먼저 여인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드린 모습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아낌이 없었음을 본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어도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나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할까?
 
*또, 사랑의 관점과 경제의 관점은 비교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경제적 관점은 상식과 계산으로 채워져 있지만, 사랑의 관점은 낭비로 채워져 있다. 삶 속에서 사랑이라는 낭비가 없다면 인생은 아름다울 수 없다. 남에게 쉽게 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주고 난 다음 아까워 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있는 것을 다주고도, 가장 아끼는 것을 주고도 적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사랑 해 본 적 있는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고 싶었고 여인은 주님을 위해 사용했다. 주님은 이 모습에 대해 세상에서 어느 때나 할 수 있는 구제와 오직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일로 설명해 주셨다. 유일한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다.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삶은 허무해진다. 주님을 위한 헌신은 일생 일대의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다.
 
*제자들은 주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여인의 행동을 몰지각한 행동으로 정죄하고 몰아부쳤다. 그런 주님은 여인을 두둔하신다.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12절)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일상에서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유일한 일이었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유일한 십자가 사건을 일상에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구제와 비교 자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보지 못한 제자들은 구제와 선행을 강조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여인은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부은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다. 제자들의 자기 절대화, 일반화의 오류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모른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헌신하는 것에 일반화된 시각과 가치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이런 일반화의 오류, 자기 절대화의 덫에 걸려들면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에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일들이 감사와 감격이 아니라 판단과 정죄, 분열과 상심으로 이어질 뿐이다.
 
 
 
 
*주님, 간계모임, 최선의 사랑과 헌신, 일반화의 오류, 자기 절대화의 자리들 중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최선의 사랑과 헌신의 자리를 늘 지키겠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신 주님의 시선을 따라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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