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가룟 유다의 최후[마 27:1-10]
 – 2023년 04월 04일
– 2023년 04월 04일 –
결과가 정해진 심문은 끝났다. 판결은 확정됐고 새벽 미명이었지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주님을 결박한 후 빌라도 총독 관저로 이송한다. 한편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형 선고가 확정되자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는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받은 은 삼십을 돌려준다. 그들은 당연히 받지 않고 유다는 그 돈을 성전을 향해 던지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밭을 구입하고 나그네의 묘지로 삼게 되고 이 또한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결론을 가져온다.
 
 
 
1.정하신 계획에 따라(1-2절)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계획에 따라 미리 알고 계신 그대로 주님을 버림 받게 하셨다. 대제사장들의 무리들은 주님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어린양(사 53:7)처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밤새도록 거짓 증언과 침 뱉음, 주먹질로 갖은 조롱과 멸시, 폭력을 행하다가 새벽이 이르자 결박해서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갔다.
 
가야바의 법정은 “신성모독죄”를 결의하였으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밤새 주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한다. 그들의 법정에는 사형을 선고할 권한이 없었고 로마 법정에 넘겨도 종교적인 죄목이 사형을 선고할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죄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 냈다. 이런 악함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다.
 
그러나 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인간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한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지 않으셨다면 또 아들 예수님이 순종하여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죄를 만들어 낸들 주님께 손 하나도 댈수 없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든 것이 진행되어 간다.
 
주님은 이과정에서 무기력하게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계획을 이루시려고 무법자들에게 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주님은 죄인이 아니심에도 죄인처럼 이리저리 넘겨지다가 십자가 저주 아래까지 넘겨지셨다. 주님이 심자가에 넘겨지심으로 내가 생명으로 넘겨졌다. 이 은혜를 끝까지 잊지 않아야 한다.
 
 
 
2.가룟 유다의 최후(3-10절)
유다는 자신의 스승을 판 대가로 받은 은 삼십을 돌려주고 스스로 최후를 선택한다. 종교지도자들은 유다가 성전에 던져 넣은 그것을 “피 값”으로 부르며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이(렘 19:1-13; 슥 11:12,13) 성취된다. 그들은 무죄한 예수님의 피 값으로 부정한 이방인 나그네를 위한 매장지로 구입했다. 이 또한 주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시려고 언약의 피를 흘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을 사실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유다는 스스로 자시의 죄를 뉘우쳤지만 이것은 단지 인간적인 후회였을 뿐이다. 베드로의 돌이킴이나 십자가 우편의 강도의 회개와 다르다. 유다의 뉘우침을 바라보며 많은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생각난다. 나 역시도 양심의 가책이 곧 뉘우침이라고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진정한 뉘우침은 ‘양심의 가책’ 수준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리라.
 
유다의 결국은 양심의 가책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선택한 자살이다. 이것은 주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확신 때문이다. 역시 스스로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양심의 가책이 죄에서 자유함을 주지 못한다. 진정한 죄에서의 자유함은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은 충분히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또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해결하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아예 그런 생각은 추호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회복은 주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만 베푸시는 회복으로만 가능하다.
 
 
 
나는?
-공교롭게도 가룟 유다의 최후 이야기가 주님께서 새벽 미명에 빌라도의 법정으로 넘겨지는 장면에서 이어진다. 무도한 종교지도자들이나 주님을 판 가룟유다의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 확신과 자기 방법”대로 하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에 대한 형을 확정하고 신성모독죄를 선고하였음에도 최대한 망신주고 조롱하다 새벽이 되자마자 빌라도의 법정으로 보냈다. 로마의 사형 선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님에 대하여 신성 모독죄를 선고했지만, 로마의 사형선고가 필요했기에 주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와중에도 주님의 죄목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을 것이다. 신성모독죄로 로마의 사형선고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간교함과 완악함이 놀랍다.
 
 
-가룟 유다의 양심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양심의 가책이 그를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양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것 밖에 안된다. 주님의 은혜와 회복의 능력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했던 제자였다. 제자 공동체의 재정을 맡았으나 요한은 그를 도둑이라고 표현했다(요 12:6). 그가 제자사장들에게 던진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땅을 사고 그 땅은 “아겔다마(피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슥 12:13,13의 말씀이 성취 되었다.
 
-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도 성취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렘 18-19장의 통기장이 밭에 대한 말씀 중에서 토기장이가 몹쓸 토기를 부수어 버렸던 그곳은 ‘힌놈의 골짜기’로 불리며 죽은 시체와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다. 그곳을 사서 이방인 나그네의 매장지로 사용한 것이다.
 
-주님을 팔기 전에 가룟 유다에게는 여러 차례 주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돈을 더 사랑하였다. 자기 이상을 더 추구하였다.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이자, 자신의 스승 마저도 자신의 탐욕 때문에 배신하고 팔아 넘긴 것이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의 길 뿐이었다.
 
 
 
 
*주님, 예언된 대로 이루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곧 나를 위한 고난과 죽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하신 조롱과 멸시가 분합니다. 그러나 그 조롱과 멸시가 저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기에 한편으로 송구합니다.
*주님, 양심이 나를 살리지 못하고 나를 살리는 것은 주님의 보혈의 공로뿐임을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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