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빌라도(빌라도의 아내), 백성들, 그리고 예수님[마 27:11-26]
 – 2023년 04월 05일
– 2023년 04월 05일 –
빌라도의 손에 넘겨진 주님께서 재판을 받으신다. 빌라도는 첫 심문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새번역_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대답하시고 고발자들의 고발에는 여전히 침묵하신다. 그들이 수많은 고발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 어색한 듯 빌라도는 이에 대하여 변론해보라고하지만, 끝내 침묵하시는 주님의 모습에 크게 놀란다. 하지만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주님이 재판에 넘겨졌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총독이 행사할 수 있는 명절 특별 사면권을 활용해 당시 유명한 죄수 바라바와 주님을 특별사면대상에 올려 놓았다.
 
한편 마태는 빌라도의 법정 뒷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빌라도의 아내의 반응에 대하여 기술한다. 그녀는 주님을 향해 “저 옳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빌라도나 그의 아내의 바램과 달리 백성들의 거센 압박에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준다.
 
 
 
1.정치적 재판_짜여진 각본대로, 그러나
주님의 재판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기소 사유를 그가 민란을 일으켜 로마에 큰 혼란을 초래할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초점을 맞췄다.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받아들였을 테고, 예수를 향한 재판도 공정과 정의, 상식이 아닌 백성들을 의식한 지극히 정치적인 판결이었다. 이 재판의 결정 기준이 백성들의 민심이었기에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는 백성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기막힌 상황 속에서 주님의 무죄함을 드러내는 (간접적) 장치는 빌라도의 태도와 그의 아내의 꿈 뿐이었다.
 
한편 죄인 바라바는 살게 하시고 의인 그리스도는 죽음에 넘겨진다. 바라바는 다른 사본에서는 “예수 바라바”로 불렸는데, 예수님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마태는 “결국 예수님은 강도 바라바(예수)를 죽음에서 놓이게 하시고 자신이 강도와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다(15-26절).
 
이를 결정짓는 대제사장들에 의해 동원된 백성들의 아우성도 빼놓을 수 없다. 거리에서 성전에서 주님께 환호 하였던 백성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협력하는 무리로 변한다. 백성들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라 하는 예수”의 이름을 연호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아들”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소리지른다. 정치적인 힘으로 로마에 저항하여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려는 혁명가 “예수”는 살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족속의 왕되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도록 요구하였다(15-17, 20-23절).
 
빌라도는 주님의 무죄를 알았고 아내의 불길한 꿈 내용으로 인해 고민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참혹한 십자가형에 처한다. 물로 손을 씻어 자신의 결백을 백성들에 앞에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넘긴 죄가 결코 물로 손 씻듯 씻어질 리 없다. 백성들도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에게 주님을 죽음에 넘긴 책임을 돌리라고 외치지만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참혹할 지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 AD70년의 예루살렘 성 멸망과 성전 파괴의 참혹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그들과 달리 자원하여 십자가로
이 정치적인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님은 평온하고(?) 담담히 자신에게 내려질 판결을 기다린다. 어떤 인간적인 변론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 가신다.
 
온 우주의 재판관 되신 주님이 한 인간 판관 앞에 죄수처럼 매도되어 서 계신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 의인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그 난감하고 난처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신다. *기억해야 한다. 그 민망한 자리가 내가 섰어야 할 자리이다. 죄인으로 심판받아 마땅한 그 자리는 나의 자리였다. 하지만 주님께서 대신하여 서 주셨다(11절).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했으나 주님은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새번역)”라는 모호한 답변만 하시고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요 18:36)의 왕이시다. *나는 내 삶속에서 주님의 왕 되심을 어떻게 인정하며 살고 있을까?
 
*적극적으로 변론하지 않으시고 변호할 기회 앞에서 오히려 빌라도가 놀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사 53:7)”과 같은 모습이다. *이는 순전히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기 위한 침묵이시며 고난의 길로 우직하게 스스로 걸어들어가시는 모습이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순종하셨다.
 
 
 
나는?
-빌라도는 당시 유대인들과 반목이 심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런 빌라도 조차 주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다. 명절특별 사면을 이용하여 예수와 바라바중에서 선택하라고 백성들의 판단에 맡긴다. 그런데 빌라도의 바램과 달리 백성들은 바라바를 선택한다. 의외의 결과에 빌라도 조차 당혹해 한다.
 
-백성에게 진리와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난감하기 짝이 없다. 우리 나라도 최근 이와같은 집단 지성의 선택을 기대하였다가 큰 낭패를 보았고 그 결과를 지금도 담당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감당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예수님과 바라바의 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함과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휘말리는 몽매함이 낳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였다.
 
-이런 무지몽매함은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백성들의 의지가 사회를 변화 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항상 선한 것을 이루어 낼 수는 없는 듯 하다. 종교지도자들처럼 백성들의 여론을 야비하게 만들어 내는 세력은 오늘날에 더 치밀해지고 간교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시대가 한탄스러울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런 무지몽매함을 분별하고 선한 판단을 위해 앞장서는 사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어렵지만 보여주어야 한다. 나도 그런 삶에 무지몽매해서는 안되겠다.
 
 
*주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침묵이었다. 목소리가 크다고 진리의 편에 선 것은 아니다. 침묵하는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내신다. 이미 2천년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다.
 
*나도 아우성 거리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진리와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침묵이라는 도구를 통해 근엄하게 흘려 보내기를 소망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싸구려 취급을 당하지 않기를 늘 소망한다. 그렇게 살아내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주님, 침묵 하시는 모습에서 진리의 영향력을 바라봅니다.
*주님, 아우성 치는 백성들이 감당해야할 참혹한 예루살렘 성 멸망이 있듯이 주님의 재림때 이루어질 심판의 무게감을 깨우치며 하루 하루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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