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믿지 않음과 믿음의 차이 [요 10:22-42]
 – 2022년 02월 04일
– 2022년 02월 04일 –
수전절(하누카)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다시 대화 하셨다. 수전절은 구약성경에 없는 절기이다. 초막절 이후 3개월 쯤 지난 12월에 있다. 이 절기는 신구약중간기의 마카비 혁명의 승리를 기념하는 절기다. 주전167년부터 164년까지 3년 동안 당시 유대지역이 포함된 시리아를 통치하던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동상을 세워 성전을 더럽힌다. 이에 마카비가 군대를 일으켜 시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이것을 기념하여 8일동안 여덟인 촛대에 하루에 하나씩 불을 밝혀 그 의미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래서 이 절기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빛의 절기”로 불렀다.


주님께서 그 수전절에 솔로몬의 행각을 거니실 때 일단의 유대인들이 다가와 명쾌하게 주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이야기 해달라고 요청한다(24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미 말하여 주었고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분명한 증거였지만 ‘믿지 않는다’ 하신다(25절). 왜냐하면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26절)” 고 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절)” 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양들에게 영생을 주고 영원토록 멸망치 않게 하고, 주님의 손에서 아무도 빼앗지 못하게 할 것이다(28절) 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께 이들을 주셨고 아버지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29절)” 결정적으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30절)”이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이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 했다(31절). 그들이 주님을 치려 하는 이유는 주님이 하신 선한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면서 하나님을 모독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33절). 하지만 주님은 시 82:6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는데(35절)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낸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로 신성모독이라 하면 말이 되는가?(36절) 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새번역_37-38절).”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 하였다.

주님은 이 일 직후 ‘다시 요단 강 건너 쪽, 요한이 처음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르셨다(새번역_40절).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요한이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은 모두 참되다(새번역_41절)” 라며 예수를 믿었다(42절)

유대인들과 대화가 안 된다.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했다(31절). 왜 그랬을까?
그런데 요단 저편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1.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22-39절).
주님께 몰려든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아니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모두는 아니지만 이미 주님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중에 어떻게 귀신 들린 이가 맹인을 고칠 수 있냐고 되물었던 사람들이거나, 바리새인들의 출교 선언이 있었음에도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경험하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돌을 들어 칠 수도 있고, 주님을 따를 수도 있는 이들 이었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구하는 이들 이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말씀을 이미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에 비추어 깨닫기 보다 전통에 따라, 장로들의 해석 만을 고집하는 오랜 문화에 젖어 참 진리를 찾는 것에 미적지근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줄기차게 이미 말씀하여 가르친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듣고 싶은 대답만이 중요했다. 즉, 자기 정답을 가지고 질문하고 그 대답이 아니면 듣지 않는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왜 믿음이 성장하거나 성숙해 지지 않을까? 그것은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믿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믿으려고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주님의 판단이 분명하다. “…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새번역_25-26절).” 충격적이게도 이미 말씀한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여기까지는 그 자리의 유대인들이 별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믿지 않는 근본적인 진단, 하나님 아버지의 것손에 들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참지 못했다. 개역 개정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번역본에서는 31절을 “이 때에” 라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지 않다 하고, 그 하나님과 주님이 하나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들이 요구하는 대답과 너무도 다른 것에 격하게 반응한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보다 앞섰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닌 이유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지 않았고, 주님이 그런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려 줘도 믿지 않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주님의 양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복음전도의 중요한 이치는 내가 믿게 하려고 초조해 하거나 발버둥 치는 것 보다, 바른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려주면 주님의 양이면 믿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나는 전하면 된다.

*그런데 전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주님께서 그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말씀을 전하는 것과 함께 하셨던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37-38절).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이라면 믿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되어 삶에 나타나야 한다.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내가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된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즉, 삶이 전도다.

*주님을 믿는 삶이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주님이 목자이시고 나는 양이기에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믿음의 삶이다. 묵상을 하거나, 성경을 읽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읽기, 생각”이다. 읽고 생각하는 시간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출발인데, 이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뒤를 따르는 삶이 되어 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애초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자기 생각, 자기 음성에만 함몰되어 자기가 원하는 음성을 주님을 통해 듣기를 원한 것 일 뿐이다.



2.요단강 건너편 사람들은 믿었다(40-42절).
주님은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려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요단강 건너편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셨다(40절).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왔다. 그의 음성을 들으려고 온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여 남겼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은 모두 참 되다(새번역_41절).”

놀라운 일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무수한 선한 일을 보고서도 자신들이 원하지 않은 한 마디로 주님을 믿지 않고 돌로 쳐 죽 이려고 했는데, 요단강 건너 편으로 나아 온 사람들은 요한의 말이 주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증명 되었다며 주님을 믿었다.

*요한이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34) 였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을 들었고, 주님의 가르침에서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믿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차이가 이것이다. 그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일 수 있지만, 주님의 양이 아니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나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른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산다.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생명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얻을 수 있다.

-믿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의 표지이다. 자기확신, 신념, 소망에 귀를 기울이나 주님의 음성에 귀가 막힌 이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가 하신 일과 말씀을 보고 들으며 그의 뜻대로 살아내는 삶을 산다.

-수전절은 이방우상에게 빼앗겼던 성전을 되찾아 깨끗히 한 승리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성전은 회복 시켰을지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유대인들은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자기들이 원하는 회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이 땅의 나라의 회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찬란한 빛을 밝히는 수전절의 절기였지만, 진정한 빛이신 주님을 외면하고 영적인 어둠으로 더욱 더 숨어 버리는 암울한 유대인들이었다. 성전의 촛불은 밝혀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의 빛은 철저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매일 묵상은 나에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기도하는 시간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떻게 뒤를 따를지 구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음성을 더욱 더 선명하게 듣고 주님의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길을 굳게 지켜야 하리라. 감사한 것은 묵상을 통해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 마음을 요동케 한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내가 주님의 양인 것이 확실하기에 감사하고 감사하다. 하지만 들었으니 그의 뒤를 따르는 삶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은 들으라고 만이 아니라 뒤따르라고 들려 주신 음성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뒤를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내야지…


*주님,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말씀을 듣겠습니다. 받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주님, 늘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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