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듣는 귀, 받아들이는 마음…. 일보다 사람의 마음이다. [삼하 19:1-15]
 – 2022년 10월 20일
– 2022년 10월 20일 –

전쟁은 끝났다. 이제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남았다. 압살롬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는 다윗에게 요압의 충언인지 협박인지 분별할 수 없는 조언에 정신을 차렸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다윗의 혈율인 유다 지파에게 그를 다시 왕으로 모셔 오는데 앞장서라고 요청하여 마침내 다윗이 왕으로서의 지위로 회복된다.



1.다윗, 듣는 귀가 있다(1-8절)
압살롬을 잃은 슬픔이 다윗을 깊은 통곡으로 이끈다. 그의 슬픔으로 인해 승전하는 군사들이 숨죽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래서 그 날 군인들은,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새번역_3절)

승리의 개선이 아니라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 처럼 슬며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4절) “마침내 요압이 집으로 왕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주요 요지는 이렇다. 왕의 모든 부하가 목숨을 걸고 왕과 왕의 아들들과 딸들, 왕비, 후궁들의 목숨을 건져드렸다. 그런데 오히려 오늘 부하들을 부끄럽게 만드셨다. 이는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고 충성을 다한 부하들은 미워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우리가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좋았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부하들에게 위로의 말로 격려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에 아무도 왕의 곁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당한 모든 환난 보다 더 무서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5-7절)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고 “일어나(즉시)”왕으로서의 자세를 회복하고 성문에 앉았다.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고대 사회, 성문에는 왕이 재판하는 자리가 있었고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기에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듣는 귀가 분명히 있었다. 요압의 조언을 듣고 “일어나” 통곡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로 돌아갔다.



2.다윗, 용서하는 사람이었다(9-15절)
온 이스라엘은 다윗의 부하들을 제외하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다. 특히 다윗이 속한 지파인 유다지파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압살롬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제 압살롬은 죽고 온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빠진다.

온 이스라엘은 서로 의견이 분분하여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다.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서 이 나라에서 떠나 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압살롬은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다윗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셔 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새번역_9-10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들은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묘수를 전달한다. 그것은 자신의 골육지친인 유다 지파 장로들에게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소통하여 자신을 모셔 가는 일에 앞장 서라고 한다. 온 이스라엘 지파들의 마음이 이런 상황인데, 자신의 혈육들이 나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먼저 용서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민 다윗의 마음에 도전을 받는다.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은 압살롬이 죽자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고 의견들을 소통하고 있었지만, 반란의 주동 세력이었던 유다 지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때 다윗은 먼저 유다 지파를 용서하고 너그럽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다윗의 이와 같은 마음에 감동한 유다지파는 “마음이 하나같이” 다윗에게로 향하였다. 이렇게 다윗이 모든 유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같이 자기쪽으로 기울게 하니, 그들이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어서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새번역_14절)

*먼저 손을 내민 다윗에게 유다 지파가 화답하였다. 먼저 손을 내민 이가 결국 승리한다. 평안을 전하는 이가 이기는 이다.



나는?
-다윗의 “듣는 귀, 용서하는 마음”이 도전이 된다. 묵상하는 시간에 듣는 귀가 더욱 예민해 지기를 바라고, 삶 속에서 말씀대로 순종할 때 먼저 말씀을 따라 순종(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내기를 기도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들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 나의 귀를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대한다. 어떻게 하면 용서하는 마음을 주저하지 않을까?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너그러이 붙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잘 듣는 것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자기 감정과 상황에 취해 적절한 반응의 순간을 놓쳐 버리면 낭패다. 나의 목회가 잘 듣는 귀와 수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여정이었으면 좋겠다. 미워하고 분열하기에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귀한 일에 시간이 부족하다.


-반란이 진압되고 압살롬은 죽어서 상황은 일단락 되었지만, 다윗의 마음을 정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동하게 된다. 승전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을 맞이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큰 슬픔에 빠졌다. 아버지의 슬픔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왕의 슬픔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왕의 자리가 가장 끈끈한 부자지간의 비극으로 인한 슬픔도 마음껏 표출할 수 없는 무거운 자리임을 보게 된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아주 가끔 있다. 개인의 슬픔보다 공동체와 성도를 위해 섬기는 것이 더 우선시해야 할 순간들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사명자의 숙명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슬픔이 공동체의 슬픔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슬프더라도 공동체가 기뻐해야 할 순간에는 잠시 슬픔의 고통을 덮고 공동체의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리더십의 자리가 무거운 것이다.


-한편 요압의 행동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든다. 발언의 수위가 정제 되지 않은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목숨을 걸고 반란을 진압한 병사들을 돌아보지 않는 왕의 행동은 백성들의 헌신을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승리를 했지만 패배한 것 같은 마음도 들게 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직언 한다. 발언의 수위가 거의 위협 수준이었지만 다윗은 놀랍게도 그 조언을 받아들인다. 슬픔과 고통을 딛고 백성 앞에 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위로를 얻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성도들을 향해 직언 해야 할 수도 있고 성도들에게 들어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잘 듣고 잘 말하는 지혜가 나에게 마르지 않기를 바래본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들갑이 눈에 들어온다. 압살롬에게 마음이 쏠려서 다윗을 버리고 그를 따랐지만, 그가 에브라임 수풀에서 죽자 다시금 다윗에게 마음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이었지만, 그에 상관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인 판단만 내리고 있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대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그들이 다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 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가 몹시 씁쓸하다.

*10절은 압살롬을 반란군의 지도자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윗은 백성들에 의해 폐위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왕으로 복권이 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추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지파의 속앓이는 커져 갔다. 다른 지파들처럼 은근슬쩍 호들갑에 동참하면 좋겠지만, 그들은 주동세력 이었다. 고민이 깊을 수 밖에 없다. 다윗도 유다 지파를 고려하지 않고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노련한 정치가이다. 그렇게 하면 유다 지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다. 다윗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런 의중을 유다의 장로들에게 전하게 한 것이다. 유다지파는 다윗이 내민 손을 붙들고 요단강가까지 나와 다윗을 맞이한다.

*다윗에게서 속전속결보다 마음을 다루는 것의 중요성을 배운다. 더디 이루어지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가는 것이 정도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혜량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보인다. 나는 늘 압살롬처럼 반역하는 존재였다. 죄에 죽은 존재였다. 그런데 애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살았다. 나는 늘 나의 이익의 유불리만 따지고 나를 위해서만 변론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셨다. 용서하여 주셨다. 그래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나도 주님의 품에 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이 아침에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나도 하나님께 이런 사랑, 이런 은혜의 손 내밀어 주심을 경험했다면,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듣고, 이해하고, 먼저 손 내밀어야지… 암 그래야지….



*주님, 다윗의 혜량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듣는 귀와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십시오.
*주님, 그 사랑 본받아 나도 잘 품고, 먼저 손 내밀겠습니다. 용기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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