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살다 보면…. [룻기 1:1-14]
 – 2022년 05월 01일
– 2022년 05월 01일 –

절망이 본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 “흉년(1절), 죽음(3, 5절), 치셨음으로(13절), 울음(14절)…”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언어가 보인다. “돌보시사(6절), 돌아오려고(7절), 함께(10절), 붙좇았더라(14절)”…. 절망의 심연 속에서 희망의 싹이 뚫고 나온다. 룻기는 이 주제를 이야기 한다.


1.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절)
유다 지파의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두 아들과 함께 베들레헴(빵집)에서 살고 있었다. 사사들이 그럭 저럭 통치하는 시기였고, 예전에는 주변의 블레셋이 늘 호시탐탐 벼르고 있다가 추수 때만 되면 밀고 들어와 추수한 곡식을 빼앗아 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사사들이 통치하고 있을 때여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있었지만, 썩 좋은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땅에 그나마 근근히 붙잡고 있었던 농사마저 힘들게 하는 흉년이 들고 말았다. 왜 흉년이 들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흉년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고 풍성한 소산물의 땅, 그 땅에 흉년이 찾아 온 것이다. 이유 없는 흉년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2.잠시 떠남… 영원한 떠남…(1절하-5절)
엘리멜렉의 가족은 잠시의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류 하였다(1절 하, 2절). 룻기의 저자는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를 반복하여 기록했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직전 “바알브올 음행 사건”으로 하루에 23,000명이 죽임을 당한 땅이다(민 25장). 보아스-오벧-이새-다윗이라는 족보를(마 1:5-6) 통해 추정해 보면 바알브올 사건은 놀랍게도 불과 50-60여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엘리멜렉은 잠시의 흉년을 피해 조상들이 죽임 당한 죽음의 땅으로 선선히 내려갔다. 오로지 흉년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거류(게르_잠시 방문, 일정 기간만 거주하다)”하기 위해, 즉 흉년의 기간 동안만 가서 살기 위해 내려 갔지만, 그곳에서 엘레멜렉은 죽음을 맞이한다. *흉년을 피해 잠시 떠난 곳에서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10년을 살게 되었다.

*엘리멜렉이 죽었을 때 나오미는 속히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나오미의 영성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저자는 엘레멜렉이 죽은 후에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 했음을 놓치지 않는다(3-4절).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결혼의 기쁨이 밀어 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원인이었는지 모압 땅에 거주한 지 십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갑자기 죽는다. *흉년을 피해 온 모압 땅은 남편과 두 아들을 집어 삼킨 죽음의 땅이었다. 십년이나 거주할 정도로 육신의 양식은 안정 되었을 지 모르지만, 마음을 지탱하던 남편이라는 기둥, 아들이라는 기둥이 차례로 쓰러져 갔다.

*잠시 머물러 온 땅,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에게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곧 돌아갈 것으로 여긴 베들레헴을 영원히 떠난 것이 되어 버렸다.


3.돌아감(6-14절)
본문에는 “돌아가다(슈브)”라는 단어가 6회 사용된다(6,7,8,10,11,12절).룻기에서는 총 14회 사용됐다. 모두 6절 이하에서만 등장한다. 나오미에게 모압 땅은 잠시 배고픔은 해결해 주었을지 모르고, 두 아들들에게 아내를 맺어준 땅이기도 하지만, 남편과 두 아들을 빼앗아간 땅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두 아들이 큰 버팀목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육신의 필요가 채워지는 땅에 머물러 있었다. 영적인 필요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십년 가까이 단절되었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무감각하여 하나님과 떨어진 인생에 허무와 절망이 밀려오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엘리멜렉이 죽고, 말론과 기룐이 죽고 베들레헴이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서 그제서야 깨닫는다.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새번역_13절).”

과부 셋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아…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구나!” 풍년의 소식을 듣고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육의 양식을 따라 살아온 “하나님 없는 삶”이 그제서야 보인 것이다. *엘레멜렉이 죽었을 때, 두 아들이 죽었을 때도 깨닫지 못한 것을 과부 셋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깨달은 것이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소산은 풍성하나 하나님 없는 허무함의 땅임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나오미는 하나님 없는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 두 며느리도 모압 땅 자신들의 집으로 돌려 보내지만, 룻은 나오미를 “붙좇는다(다바크_달라붙다, 굳게 결합하다, 충실히 대하다)”. 룻은 나오미에게 달라붙었다. 충실하게 대하였다. 하나님 계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홀로가 아닌 룻이 충실하게 달라붙어 함께 왔다!.


나는?
-본문의 흐름에서 벗어나지만, 모압 땅에서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잘 정착하고 어울려 살았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자신들의 딸을 그의 아들들에게 아내로 내어 주었다. 놀라운 개방성이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구별된 선민이라는 굳은 생각 속에서 이방인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가 강한 유대사회와 분명한 차이점이다. 사실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이런 자신감과 개방성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이방사회에서 이런 관용이 보인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향한 관용은 사라진 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지체들을 향한 낯설음을 를 뚜렷이 드러내는 모습을 늘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 없는 풍년을 늘 분별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부요함 만을 쫓으면 안 된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흉년이 엄습해도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면 흉년을 견뎌야 한다. 그곳에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어도 흉년은 찾아온다. 엘리멜렉은 그 흉년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땅으로 거리낌 없이 옮긴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스스럼 없이 버린다. 하나님을 버린다. 그리고 흉년 없는 모압땅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곳은 소산이 그치지 않더라도 생명이 꺼져 가는 곳이었다. 비록 흉년이 들었어도 생명이 굳건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땅을 포기하지 말아야 했다.

*나오미는 매우 따뜻한 여인이었던 것 같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유대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나선 두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새번역_9절).”…” 돌아가 다오, 내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새번역_12절)” 이런 행동 속에 나오미의 따뜻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직 충분히 젊은 며느리들에게 새 삶을 시작하도록 진심으로 권하고 또 권한다.

*아.. 이런 따뜻함이 그립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따뜻함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을까? 어떤 성도라도 그 말과 행동에서 나오미와 같이 며느리들을 배려하고 생각하며 위하는 말처럼 공동체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정말 좋겠다.

*한편 룻은 나오미의 따뜻한 배려(?)에도 끝까지 “붙쫓는다!” 왜 그랬을까? 시어머니의 말과 행동(9-12절)에서 드러나듯 함께 한 삶 속에서 분명 모압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았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나오미와 함께 가는 길이 곧 생명의 길임을 알았을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보아왔고 느껴왔던 것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붙쫓게” 하였다.

*나오미든, 룻이든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남편, 두 아들… 모압 땅에서 더 이상 의지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더 이상 이방의 땅에서 이방으로 살아갈 힘을 잃었다. 그녀를 보호해 줄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을 향해 눈을 돌린다. 흉년을 피해 내려왔던 그 길을 이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온 가족이 함께 내려왔던 그 길을 홀로 걸어갈 판이다.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선 두 며느리는 도저히 함께 데리고 갈 수 없다. 며느리들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들이 고스란히 보여, 그녀들을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룻은 그런 시어머니의 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시어머니를 “붙쫓아” 따라 나선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 되었다.

*여호와의 돌보심을 깨닫고(6절),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치셨음에도(13절), 하나님께로 다시 올라가는 나오미의 걸음에 룻이 함께 따라 붙었다….


**주님, 이유 없는 흉년의 때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괜찮습니다. 이런 믿음을 주십시오!
**주님, 다 잃어버린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나오미와 같은 믿음의 태도를 주십시오.
**주님, 룻이 나오미를 붙쫓았던 그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을 이렇게 붙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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