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텅 빈 시간이 결말이 아니다. [룻기 1:15-22]
 – 2022년 05월 02일
– 2022년 05월 02일 –

다르다. 참 다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약간의 시각차가 존재하고 이로 인한 크고 작은 갈등이 늘 있기 마련인데… 다르다… 더 나아가 이런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오미와 룻의 사랑이 감동이다. 나오미의 애틋하고 따뜻한 만류에도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과 나오미의 백성을 선택하고 “붙쫓아” 따라간다. 대단하다.

그렇게 함께 돌아온 베들레헴이지만, 흘러간 십년의 시간은 나오미의 신세를 더욱 한탄하게 할 뿐이다. 더구나 그녀는 가장 힘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귀한 며느리 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비어” 돌아오게 했다면 탄식한다(21절). 이 탄식은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는 고백을 통해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느끼게 한다.

가족으로 나갔다가 홀로 다시 돌아온 나오미, 그 곁에 “붙쫓고” 서 있는 역시 홀로 된 룻… 그들이 돌아온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은 이제 막 보리 추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은 풍성한 보리 추수의 흥겨움이 넘치지만, 나오미와 룻은 십년 전 흉년으로 이 땅을 떠날 때 보다 더 큰 마음의 흉년 속에 풍성한 들녘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1.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5-18절)
나오미는 오르바가 모압 땅에 남는 것을 보고, 룻에게도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아직 젊으니 미련 없이 재혼하여 살 길을 도모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룻은 나오미에게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말라(16절)”고 말한다. 더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굳은 결심은 확고했다. 단지 늙고 힘 없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가련한 여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만 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룻은 이어서 매우 놀라운 고백을 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책임만이 아님을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 하)” 라는 고백으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고백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한다(17절). 나오미는 이런 룻의 결연한 의지를 보고 더 이상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18절).

*어느 날 자기 마을에 들어선 낯선 유대인 청년을 신랑으로 맞이한 모압 여인 룻… 이것이 정말 잘한 결정일까 판단하기에 설익은 시기에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런데 크게 슬퍼할 겨를도 없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미 남편을 잃었고, 두 아들 마저 함께 잃었으니 이 기막힌 동병상련의 모습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슬픔을 크게 내색할 수도 없이 애써 감추고 서로를 위하는 나오미와 룻의 모습이 참 애처롭다.

*하지만 애처로운 감정만으로 과부에다, 모압 여인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함께 동행하는 결정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룻의 신앙이 분명히 신실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모압 여인임에도 이제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모습을 보면 단지 애처로움으로 따라 나선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룻의 나오미와의 동행은 모압(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모압은 늘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지 못했기에 이런 행보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룻의 결정은 국가 관계나, 사회적 관계에 얽힌 것을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의 백성은 어머니의 백성과 같고, 나의 하나님은 어머니의 하나님과 같다는 확고한 고백으로 모압(세상)을 떠나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으로 들어왔다.

* 룻의 고백이 상서롭다.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서 고백 되어야 할 말 아닌가?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나의 공동체, 우리의 공동체….”



2.나오미가 아니라 마라..(19-21절)
나오미는 “기쁘게 하다, 희락”라는 뜻이다. 베들레헴에 온 가족이 함께 살고 있을 때는 이름의 의미처럼 “기쁘게 하는”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녀가 돌아오자, 베들레헴 성읍이 “떠들었다(훔_흥분하다, 동요하다)” 그리고 “이이가 나오미냐?” 묻고 또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것이다. 엘리멜렉은 어디에 있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모압으로 떠나기 전 나오미의 일상이 어떠했을 지 짐작 하고도 남는다.

나오미는 동요하는 주민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마라 라고 부르라고 한다(20절). “마라”라는 의미는 “괴로운, 쓴”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쓰디 쓰게, 괴롭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가족과 함께 떠났다가 홀로 돌아온 자신을 한탄하는 말이다.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쳐서 시험)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새번역_21절)”

*하나님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온 가족과 함께 떠났지만,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다는 깊은 한숨이 희락의 여인 나오미에게서 흘러 나온다. 예전에는 기쁨을 주는 여인이었지만, 이제 무거운 괴로움이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하나님의 주권을 덤덤하게 받아 들인다. “쳐서 시험”하셨다는 그의 고백이 깊은 울림을 준다.

*나오미가 스스로 말한다. 나를 마라 라고 부르라고…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마를 때 하나님께서 “쳐서” 생수를 내셨지만, 나는 모압에서 하나님께서 “쳐서” “텅 비어” 돌아왔다. 쓰디쓴 고통의 눈물이 올라오는 마음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있다. 늘 희락이 넘치게 하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쓰디 쓴 고통의 물을 마셔야 할 때를 지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심을 나오미는 쓰라리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십년 만의 귀향… 희락은 사라지고 괴로움의 귀향… 온 가족이 함께 나갔다가, 홀로 돌아온 귀향… 그 허무함과 절망, 고통을 베들레헴 거리에서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3.며느리 룻과 보리 추수 시작할 때…(22절)
저자는 비통함에 나 홀로 밖에 남지 않았다고, 텅 빈 인생이 되어 버렸다고 절망하는 나오미를 바라보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새번역_22절)” 이라고 여운을 남긴다.

나오미는 결코 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결연하게 고백하고 모압 여인이면서 과부가 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꿋꿋히 자신을 따라 함께 돌아온 “룻”이 있었다. 더구나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슬픔 중에 들었던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6절)” 따라 돌아온 고향의 추수 시작을 알린다.

*자신에게 고통만 안겨 주신 하나님이신 것처럼 보이지만, 긍휼과 인애의 하나님의 마음을 꼭 닮은 며느리 룻과 풍성한 추수의 때가 시작 되었음을 일깨우심으로 나오미에게 시작될 회복을 기대하게 한다.

*자신은 “텅 빈” 상태여서, 공허와 절망만 바라 보았지만, 나오미의 발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룻”을 함께 하도록 붙여 주셨고, 보리 추수가 시작되어 헐벗고 가난하며, 절망에 빠진 두 과부의 삶을 책임 지시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셨다.

*삶이 그렇다! 나는 늘 나의 공허와 절망, 아픔과 고통을 보고 “마라” 같은 인생이라면 한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나오미(희락) 같은 삶으로 이끄시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조용히 붙여주시고 예비하여 주셨다.

*때로 하나님의 이끄심에 좌절하는 시간을 보내더라도 “함께 걸어갈” 이를 붙여 주시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추수”의 때처럼 풍성한 은혜의 시작을 앞서 가시며 준비하신다. 나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텅 빈 자리에서 다시 함께 채우시기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이다.



나는?
-늘 그랬다. 텅 빈 시기라고 생각하여 좌절하고 고통 스럽던 그 시기는 늘 누군가 나의 힘이 되어 주기 위해 옆에 있었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회복과 채움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내 채워 졌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인생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텅 빈”것만 보인다. 함께 있는 “룻”과 같은 이가 안 보이고, 시작된 보리 추수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만 괴롭고 아프고 힘든 것 같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룻을… 추수의 때”를 어김없이 붙여 주시고, 시작하신다.

*그러니, 텅 빈 절망의 때라도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지! “룻과 같은 이를 붙여 주시고, 추수의 시기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지… 텅 빈 자리에 은혜로 가득 채우실 하나님을 기대해야지…

*나오미의 인생 이야기의 하나님이 나의 인생 이야기의 하나님이시니까!

*텅 빈 시간이 내 인생의 결말이 아니다! 거둠(추수)의 시간이 곧 시작된다.


**주님, 홀로 선 텅 빈 시간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늘 “룻”과 같은 이를 제 곁에, “보리 추수”의 때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회복과 채움의 시간이 준비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견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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