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믿음과 순종, 안식과 완고함 [히 4:1-13]
 – 2022년 07월 05일
– 2022년 07월 05일 –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음을 강조하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또한, 본문은 3:12-19절에서 확신을 끝까지 붙잡으라는 권면과 연결된다. 확신을 끝까지 붙잡게 되면 안식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확신을 끝까지 붙잡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 직후 하나님의 안식(3-5절)을 설명하고 아직 남아있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힘주어 말한다(6-11절). 안식은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더라도 이르지 못할 자가 있는데 이는 믿음의 문제이며(1-2절), 이 믿음은 말씀 앞에 남김없이 드러남을 경고한다(12-13절).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본문에서 말하는 안식은 무엇일까?



1. 안식은 완성이다.
본문은 “안식”장이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안식을 거론하는 성경이 없다. 안식은 글자 그대로 ‘쉬는 것’이다. 창조사역 후 쉬신 것이 안식의 근원이다. 하지만 단지 일하는 도중의 쉼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창조사역을 중단하시고 쉬시지 않으셨다. 완성하시고 쉬신 것이다. 중단이 아닌 완성이다. 포기가 아니다. 아직 사역이 많이 남았는데 잠시 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본문은 안식과 함께 “들어간다(1, 3, 5, 6, 10, 11절)”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결말이며, 완성이다. 그렇다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후에 기회가 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예 없는 것이다. 안식은 “결산”이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잠시 쉬고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식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한 결산이다.



2. 안식 출입증은 “믿음, 순종”이다.
복음을 믿는 믿음이 안식에 들어가게 한다(2절). 마음이 완고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7절). 순종 하지 않는 자들의 본을 따르지 말라(11절). 믿음과 순종의 절대적 중요성을 다시 언급한다. 3장에서도 가데스바네아의 반역 사건의 핵심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이었음을 예로 들었는데, 본문도 이 맥락이 이어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대한 시험대가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신뢰하는가의 태도일 것이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나의 자세가 곧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절대신뢰지수의 척도이다. 믿음과 순종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이끈다.



3. 믿음과 순종의 수준은 말씀 앞에서 다 드러난다(12-13절).
본문은 직접적으로 말씀의 능력을 믿음과 순종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말씀 앞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예리하게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결국 말씀 앞에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런척하며 살더라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벌거벗은 것 같이” 믿음과 순종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완성해 놓으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오는 순종하지 않는 것이 원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이런 불신과 불순종의 마음을 종교와 형식, 율법과 제사와 같은 포장지로 잘 포장했을지라도 “예리한 칼날처럼 사람 속, 마음과 영을 꿰뚫고 생각과 의도를 밝혀낸다.” 말씀의 예리한 칼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 선 검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총체적으로 판단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심판의 의미에 국한 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그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 필요한 하나님의 공급하여 주시는 힘이 말씀을 통하여 공급된다는 의미도 있다. 나의 눈과 귀를 열어 완고해 질 수 있는 마음을 충분히 발라 내는 말씀의 예리함 앞에 서면 설 수록 나의 완고함은 벗겨 내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순종들로 채워지는 삶이 될 것이다.



나는?
-안식은 중간에 버거워 쉬는 것이 아니다. 결론이며 완성이다. 그렇기에 기회는 단 한번 뿐이다. 그렇기에 날마다 말씀 앞에서 믿음과 순종이 벌거벗겨져야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울려퍼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매순간 내 앞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이고 기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믿음으로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순종으로 감당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오늘도 나를 숨김없이 벌겨벗겨 주시는 말씀을 주셔서 감사한 이유다. 지금 말씀으로 벌거벗겨지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나를 간섭할 때 그것이 곧 은혜이며 축복이리라.


*이미 완성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을 “완고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완고함”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3장은 줄기차게 완고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3:8, 13, 15절) 본문도 역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완고함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떤 날을 정하시고, 이미 인용한 말씀대로, 오랜 뒤에 다윗을 통하여 ④”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시 95:7,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새번역)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분명한 교훈을 주었던 “완고함에서 온 실패”를 반복하지 말고 “오늘”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완고하다는 뜻은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세다는 의미다. 개역 성경은 “강팍하다”로 번역했었는데,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는 뜻이다. 고지식하다, 고루하다와 뜻이 연결된다. 요즘 세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라떼”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누구라도 그 구원에서 제외된 자로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 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완고한 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에 대하여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며 이단시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신앙 지식과 신학 논리에 천착하여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 처럼’ 판단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완고하다는 것은 “자기 절대화”와 다름 없는 표현 일 수 있다.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달라야 한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 모든 이들도 하나님의 한량 없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늘 인정해야 한다. 단순한 선과 악의 이원론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의 마음과 삶 속에 일어나는 안식은 어쩌면, 내 마음 속에서부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속 다른 이들에게도 향하여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같이”의 가치가 생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아닐까?

*그래서 저자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4:1 새번역) 라는 말씀이 깊이 와 닿는 아침이다.



**주님,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은 “함께, 같이” 들어가고 누려야 할 것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나에게만 주신 믿음과 순종의 은혜가 아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직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도 역시 한량없는 은혜로 주실 것이기에 경박스러운 완고한 마음과 태도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라떼”는 카페에서 마시는 것으로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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