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너는 누구냐?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 1:19-28
 – 2022년 01월 03일
– 2022년 01월 03일 –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태초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 은혜와 진리(인자와 자비)이신 하나님이심을 살펴보았다(1-18절). 본문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났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역시 6개월 앞서 준비한 세례 요한의 이야기이다.


1.너는 누구냐?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정작 참 빛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거절했다. 유대인들(종교지도자들)은 참 빛을 증언하는 세례요한에게 직접적으로 묻는다. “네가 누구냐?(19절)”

다른 복음서에서의 세례요한의 사역은 당시 유대사회에 놀라운 충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종교지도자들(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 직접 정체를 물었다(19절). 그런데 세례요한의 대답을 미루어 보면 이미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 “엘리야”, “선지자”등으로 소문이 나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직접적인 그들의 물음에 각각 “아니라”고 대답한다(20-21절).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을 보낸 종교지도자들에게 할 말을 알려 달라며 재차 묻는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절) 이 질문에 대하여는 명확하게 대답한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절).”

그러자 또 묻는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25절)” 이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27절).”고 대답한다.

세례요한은 메시아도 선지자도 아닌 사람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주)의 길을 예비 하는 역할을 한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특히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 구체적인 사역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요한을 그리스도처럼 선지자처럼 여겼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사람들의 인정을 거절한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역할일 뿐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에 대하여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요한의 영성에 도전을 받는다.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 명성을 얻고 사람들의 인기에 취해 본분을 잊어버릴 수도 있을 듯 한데 도무지 흔들림이 없다. 오늘날 조금만 유명해 져도, 아니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만 되도 마치 자신이 주인인 양 당연시하는 이들과 분명한 비교가 된다. 끝까지 높은 명성과 인기를 등에 업고 중심부로 진출하지 않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와 물로 세례를 베푸는 한적한 요단강 한편의 베다니에 머물기를 유지했다. *이런 마음과 태도가 곧 사역자의 자세일 것이다.


2.세례요한의 대답, 나의 대답
*유명해 지고 싶은 마음 왜 없겠나! 인정받고 싶고 영향력이 행사 되어 지는 것에 왜 우쭐해 지지 않겠나! 하지만 세례요한의 영성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해야 한다. 나는 주님을 증언하는 증인일 뿐 주님이 아니다! 주님의 모습을 흉내 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내가 주님은 아니다. 예수님처럼, 더 예수님처럼 살아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느끼도록 해야지, 내가 예수님이 되면 안 된다.

*세례 요한의 정체를 묻는 바리새인들(유대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19, 24절)에게서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씁쓸하고 고통스럽다. 묵상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질문을 되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야?”

*성령께서 오늘 아침에 이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신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새례 요한은 망설임 없이 나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이들은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 레위 사람들, 바리새인들이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나는 이 질문 앞에 망설임 없이, 또렷하게 대답할만한 삶을 살고 있을까? 세례요한의 대답에서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새번역_23절).”


3.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그의 신발끈 조차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고 선언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소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길을 소리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다. 소리를 치는 것은 듣게 하기 위해 치는 것인데, 그 소리를 “광야”에서 친다. 허~~ 이게 웬 일일까?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혈통으로 세습되는 제사장이기에 그는 절로 제사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 직을 수행할 수 있는 도시, 성읍에 거하지 않았다. “광야”에 거했다. 유대사회의 전통과 관습에서 오는 기득권을 스스로 버렸다는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도 그가 도착할 곳은 제사장의 자리였다. 그는 안정되고, 명예롭게 될 수 있는 모든 보장된 도시, 성읍을 떠났다. 그리고 광야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득권 조차 내려 놓고, 자신의 삶의 안전함과 편리함, 익숙함도 내던지고 “어색하기 그지 없고, 고통스러우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광야를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갔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이 “주의 길을 예비 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즉, 오랜 종교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곳은 주님이 주님 되실 수 없다는 의미다. 주님의 주님 되심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안전하며 익숙한 곳에서는 어렵다. 자신들에게 모든 것이 맞춰져 있기에 그 익숙함과 편리함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 무엇보다 종교가 제도가 되고 전통이 된 곳에서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의 주님되심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하다.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는 오직 주님만이 최고, 최선이 되는 장소다. 인간적으로 기댈만한 어떤 것도 없다. 배경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곳이 광야다. 개사 선 이곳에서 광야에 선 심정으로 절박하게 주님을 구하며 의지하고 또 의지해야지….


*한편으로 바리새인들이 보낸 그들에게 요한이 되물었다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에 대해 묻는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에는 “너희는 어떤 존재냐? 하나님의 백성다우냐?”

*바리새인은 주전 2세기경 헬라문화가 깊숙히 유대의 전통을 흔들어 세속화되어가는 때, “반 헬라 친 율법”을 부르짖은 경건운동을 따르는 사람들로 출발되었다. 매우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삶의 모범이 되어 유대 사회에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처음 시작과 달리 점차 지나친 율법주의, 극단적인 분리주의와 이에 따른 권위주의에 함몰되어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마 12:34),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마 15:14)”라고 질책하셨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것이 순수한 궁금증이 아닌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릴 것에 대한 반응들이었다. 이들의 이런 불안한 마음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초심을 잃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다움의 초심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세례요한은 이 초심을 다시 일으켜 메시아되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다.


*또, 세례 요한은 자신을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에게 삶의 지향점이 고정 되어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말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선지자나 엘리야일 수 없다고 졸곧 고백한다. 오로지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만 말하는 것에 집중한다.

*내가 죄에 대하여 무력한 존재임을 잊지 않을 때 내 삶에 예수님의 주님 되심이 상실되지 않는다.


나는?
-세례요한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의 대화는 묘하게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와 “데칼코마니”이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사역을 시작한 그가 이토록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모습과 닮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기에 가능하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에 성실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과 화법을 자연스레 닮기 마련일 것이다. 삶이 예수님을 닮아간다.

-나는 목사다. 새해에도 이런 저런 사역의 현장에서 늘 목사로 서 있을 것이다. 목사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외치는 소리”이다.

-이것을 광야에서 외쳤기에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을 외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외칠 때 그곳으로 복음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나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ㅔ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려고 복음이 외쳐지는 곳으로 사람들을 나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렇기에 세례요한의 영성을 잊지 않고 나도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잊지 않고 사역해야 겠다.

– “너는 누구냐? 너는 네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주님, 세례 요한의 영성을 닮겠습니다. 주님의 주님 되심을 “외치는 소리”를 그치지 않겠습니다.
*주님, 소리 뿐 아니라 광야에서 그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주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주님되심을 외치는 소리, 광야에서, 늘 겸손하게 오롯이 살아내는 영성을 갈고 닦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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