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시작하다! [삼상 1:1-18]
 – 2022년 05월 08일
– 2022년 05월 08일 –

한 여인이 불임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 나왔는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불임은 고통은 넘어 수치 였다. 불임으로 고통받는 한나를 남편 엘가나는 말로 위로 하지만 공감이 되지 않고, 또 그녀의 적수인(6절) 브닌나는 “격분”하게 만든다. 엘레 제사장은 한나의 기도를 출 취한 것으로 오해한다. 한나는 홀로 불임의 고통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불임은 여인에게 치명적인 수치이며 고통이었다. 간절함이 기도를 이끌었다. 불임의 고통은 간절함을 불러왔고 간절함이 복을 불러왔다. 브닌나의 격분시킴은 괴로움을 극대화 했고, 결국 그 격분이 하나님께 필사저긍로 매달리게 했다. 나를 분노하게 하고 처절하게 하는 대적이 하나님 앞에서 필사적으로 서게 했다. 그 괴로움으로 매달린 기도가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시작되게 하였다.

*괴로워서 기도 했는데… 슬퍼하며 통곡하여 기도 했는데… 시대를 바꾸는 지도자를 보내 주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 그 자체이다!


*한나의 상황은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상황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미 가나안에서 변방이 되어 버렸다. 블레셋은 요단강 좌우를 아우르는 가나안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격분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가 끊어진지 오래 되었고 이를 분별해야 할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시대를 읽는 눈이 없었다. 나라가 힘이 없어 블레셋에게 굴욕을 당해도 맞서 싸울 용기 있는 지도자도 나오지 않았다. 경제, 사회, 종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였다.

*한나의 불임, 이스라엘의 절망… 개인이나 공동체나 이 상황 앞에 괴롭고, 슬퍼하며, 격분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


*사무엘상하는 본래 한 권이다. 히브리어의 헬라어 역본인 70인경에 의해 상하 두권으로 구분되었다. 이 책의 중심 인물은 사무엘, 사울, 다윗이다.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치체계가 신정정치에서 왕정정치로 변화된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어 개인의 소견의 옳은 대로” 각자도생 하는 시대였다.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큰 혼란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를 온전히 이스라엘에게 구현하시기 위해 “왕정”을 채택 하셨다. 이 역할을 사무엘을 통해 이끄셨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출생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두 아내를 둔 명문가 가문의 엘가나의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브닌나는 자식이 많았지만, 한나는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시지 않았다. 한나는 엘가나에게 사랑받는 아내였지만 무자하였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자식이 많은 브닌나의 질투로 괴로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1.경건한 삶이어도(1-3절)
엘가나에 대하여 성경에서 드물게 그의 족보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아버지는 여로함, 할아버지는 엘리후, 증조할아버지는 도후, 고조할아버지는 숩이다. 1절은 엘가나 가족의 거주지는 에브라임 산지라고 밝힌다. 그에게 아내는 두 명이었는데, 한나(은혜)와 브닌나(열매로 무성한 자)이다. 이름 그대로 브닌나는 자녀가 있었고, 한나는 무자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했다. 당시 여인에게 불임은 이혼 사유가 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엘가나의 가족은 사사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경건한 삶을 유지 했음을 알 수 있다. 3절은 매년 당시 성소가 있던 실로까지 예배하러 올라갔다. 라마에서 실로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35km 정도였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면 약 이틀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이다. 엘가나는 율법이 정한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수장절_출 23:14-17)중 하나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매년제(가족 중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갔다. 이것은 율법적인 의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를 꾸준히 드리는 것을 볼 때 엘가나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엘가나의 믿음은 매우 돋보이는 것이었다. 제자상들 조차 율법을 쉽게 어기던 시대에 영적으로 깨어 있던 평신도였다.


*그런데 이런 경건한 삶에도 고통이 있었다. 한나의 불임이 그것이다. 엘가나는 그런 한나를 지극히 사랑하였지만, 브닌나로 인해 격분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펼쳐졌다. 브닌나는 왜 한나를 격분하게 했을까? 본문에서는 이렇게 힌트를 준다.

“4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는, 늘 아내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아들 딸에게 제물을 각각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다.(새번역_4-5절)”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케 한 이유는 매년제를 드리고 난 후 엘가나가 그 제물을 나눌 때 한나에게 두 몫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신명기 21:15-17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장자의 권리가 브닌나의 아들에게 있기 때문에 갑절의 몫을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엘가나는 갑절의 몫을 한나에게 주었다. 엘가나는 무자한 한나를 더 생각하여 한 행동이겠지만, 브닌나는 자기 아들이 율법에 보장된 장자의 권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함 속에 이와 같이 격분케 했던 것이다.

자녀들의 문제라면 엄마들은 독을 품는다! 브닌나는 한나를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런 상황이 해마다 반복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엘가나의 가정… 경건했지만, 오히려 이 경건의 형식이 집안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통로가 되었다.


*또 한나의 격분은 엘가나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자기중심적이다. 지혜롭지 못했다. 제물의 몫을 2나누는 것 뿐 아니라 자식이 없어 슬퍼하는 엘가나에게 자기 입장으로만 위로한다. “8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새번역_8절)”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나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 개역 개정은 “어찌하여… 하며, 어찌하여… 어찌하여 … 하느냐?” 라고 번역했다. 이런 구문은 성경에서 꾸지람, 질책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구문이다. 또, 한나를 위로하려는 말의 주어가 “나”이다. 한나가 주어가 되었어야 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대는 나에게 열 아들보다 소중하오!”라고 했어야 했다. 엘가나는 한나의 고통은 공감하지 못한 채 금식하고 슬퍼하는 한나를 위로한다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됐다! 한나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어야 할 남편마저 자신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슬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엘레 제사장도 한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사사시대는 백성들을 살피고 목회해야 할 제사장들이 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파렴치한 늑대가 된 세상이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대표적이다. 영적 지도자에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도움을 커녕 핀잔만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보다 한나를 괴롭게 한 것은 “하나님”이셨다. 사무엘 저자는 한나의 자식 없음을 불임이라고 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반복하며 “여호와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다”라고 기록했다.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힐 때 던진 무수한 독설들 중에 이 말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불임이다”와 “하나님께서 태를 닫으셨다”의 차이는 크다. 후자는 정죄감 뿐 아니라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된다.



2.그럼에도… “일어나”(9절)
일어났다(바타콤) 라는 동사는 과거의 단회적인 사건을 기술할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매년 반복되는 갈등과 절망의 순환을 끊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한나의 첫 행위가 바로 “일어남”이다. 깊은 절망, 희망이 없다고 탄식할 때, 한나가 일어섰다!그리고 여호와 앞에 나아갔다.

매년제를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실 때 한나는 금식하며 “일어나서 여호와 앞에 섰다. 온 가족이 기쁘고 즐거운 잔치의 자리였지만, 한나만 슬펐다. 하지만 슬픔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고통과 절망에 묶여 무기력하지 않았다. 불임의 수치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서도록 이끌었다. 삶이 희망이 없다고 무기력하게 주저 앉으면 안 된다.



나는?
-룻기와 사무엘서는 모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의 본질적인 특징은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기준이 되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룻, 보아스, 사무엘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함부로 이 시대를 매도할 수 없다. 룻과 사무엘은 모두 다윗을 준비 시킨 인물들이다.

-한나의 절망, 희망 없음은 이스라엘의 절망과 희망 없음과 병치 된다. 그런데 희망 마저 끊어진 한나는 그곳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선다. 사사시대의 암울한 상황에서 안으로는 영적인 타락을 넘어 패망의 시대에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 끝에서 한나의 행동이 마치 등대처럼 길을 비춘다.

-“희망이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는 것 밖에 없다…. 그 자리가 희망이 회복되는 자리다!


*모든 기대가 꺽인 곳에서 다시 기대를 가지는 것 자체가 세상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곳에서부터 희망은 다시 시작된다.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희망은 생기기 마련이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이지 않으면 희망은 견고해 진다.

*그래서 기도는 희망을 이어가는 통로다!



**주님, 절망의 끝, 희망이 사라진 곳에도 하나님은 계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 사무엘은 절망의 끝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의 희망이 된 줄 압니다. 이 땅의 교회도 이것을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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