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4-5:10]
 – 2022년 07월 06일
– 2022년 07월 06일 –
안식에 들어가기 힘써야 하는 우리에게는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을 통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 대제사장인 아론보다 뛰어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구원의 근원되고 온전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1.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4장 14-16절)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이유는 먼저, “하늘을 통과하신(새번역)” 분이기 때문이다.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었던 휘장을 열어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그 곳을 예수님을 따라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신적 지위와 인간 본성을 함께 지닌 분이심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백성들의 중보자가 되어 주시기에 충분하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시다. 인간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길도 예수님이 열어 주셨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과 시험을 당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무엇보다 인생의 아픔과 연약함을 누구보다 공감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동정해 주실 분이시다.

*힘들고 지친 삶 속에서 “돕는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간절하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곧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찾으며, 두드리는 믿음의 시도가 멈추지 않아야 한다.



2.아론보다 뛰어나신 대제사장(5장 1-4절)
대제사장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 드리는 것을 돕는 자이시다. 그런데 이들은 인간이다. 그들도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 한다(5:1). 자신이 인간이기에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용납한다. 이 점에서 인간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예수님과 인간 대제사장과의 공통점은 죄인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인간 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2절). 하지만 예수님은 레위지파의 후손이 아니며 죄가 없으시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백성을 대표하지만, 사람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 중에서 세워진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인간의 대표로서 예물과 속죄제를 드리지만, 자신도 연약하고 죄가 있기에 예물과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1-3절).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지만 죄가 없으시기에 이럴 필요가 없다.

또한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 취할 수 없다. 아론과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과 임명을 통해서만 세워진다(4절).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대제사장직을 취하려다 몰살 당한 고라 자손과 그의 무리들을 기억해야 한다(민 16장).



3.멜기세덱의 반차(방식,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5장 5-10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6절).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시다. 죄인이 아니다.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죄인들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않았다(4:15).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라 인정함을 받고, 멜기세덱의 뒤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임명 받아 인간을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 하나님의 들으심(용납)을 얻었다(5-7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8-9절)”. 이로 인해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이때문에 멜기세덱의 뒤를 잇는 대제사장이라 칭함을 받으신 것이다(10절).




나는?
내가 바라보고 따라야 할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는가? 오늘 본문에서 특히 눈길이 머무는 구절이 있다. 8절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고난을 당함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함을 배우셨다. 주님의 순종함은 고난을 당함으로 빚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신 중요한 목적이 바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순종함을 통해 받고 누리는 것임을 다시 확인한다. 결국 예수님의 “큰 대제사장”되심은 순종의 열매인 것이다. 순종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열매가 되기까지 “고난”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사실 온전히 순종 하려는 마음 자체가 고난이다. 내 마음의 고난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순종과 불순종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마음에서부터 이미 고난(?)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체적인 일상 속에 순종하기 위한 고난의 도전과 순종의 응전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며 “온전한 순종”을 빚어낸다.

얼마나 실패가 많을까? 마치 도공이 작품을 위해 거리낌 없이 파쇄하는 과정과 같을 것이다. 끊임없이 불순종이 깃든 것을 파괴하고 버리지 않으면 온전한 순종이 빚어질 수 없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는데….


-순종의 깊이를 생각해 보았다. 형식적인 순종은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온전한 순종”이라… 멀고도 먼 수준이구나.

-순종의 중요성이 더욱 각성 된다.

-하지만 순종의 방향성이 참 중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순종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이어야 한다. 나의 계획을 충실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충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순종은 형식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마음을 다하는 순종은 결국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기에, 마음이 깨닫지 못하는 일상은 마음을 다해 순종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한다.

-마음은 말씀이 감찰하신다. 어제 본문에서도 말씀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말씀이 결국 순종의 출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에서 깨우쳐 주시는 순종을 미루지 말아야지….



*주님, 믿는 도리(고백)을 끝까지 순종하여 예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나에게도, 교회에도, 나라와 민족에게도 늘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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