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직도 초보라니… [히 5:11-6:8]
 – 2022년 07월 07일
– 2022년 07월 07일 –
본격적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논증을 이어가려다 멈춘다. 그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내용만 아는 것에서 벗어나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라고 권면한다(5:11-14절). 그리고 성장하고 성숙하여 벗어나야 할 초보적인 수준이 무엇인지 다루고(6:1-2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의 위험성과 결과에 대하여도 빼놓지 않는다(4-8절).



1.왜 아직까지?(5:11-14)
저자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에 대한 논증을 잠시 접는다. 그 이유를 “듣는 것이 둔하므로”라고 밝힌다(5:11). “둔하다(노드로스)”는 “나태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저자가 안타까워 하는 이들은 “시간으로 보면 … 이미 교사가 되어 있어야 할(새번역_5:12 상)” 이들이었지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배워야 할 처지, 즉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된(새번역_12 하)” 이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은 이후 나태하고 게으른 삶으로 성장하여 성숙의 열매를 맺혀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고 난 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롬 12:11)”야 함에도 “둔하여(게을러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더 높고, 모세 보다 더 탁월하며 아론 보다 높으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되신 지식을 듣고 받아들여야 함에도 여전히 믿는 도리의 초보 수준에 머물렀다.

*안타깝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잔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라는 설명을 알아듣기에는 독자들이 신앙적으로 너무 어렸다. 복음을 들은 지가 선생이 되어야 마땅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둔하였기” 때문이다. 게을렀기 때문이다.

*무엇에 게을렀을까? 운동 선수가 몸을 훈련하듯 배우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반복적인 영적 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다는 심각한 영적인 신호임을 깨달아야 한다.



2.기초(터) 닦기는 제발 그만!(6:1-3)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있다. 회개와 믿음(과거의 회심), 세례와 안수(현재의 교회 제의), 부활과 심판(미래의 소망)이다. 이와 같은 것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기초 중의 기초다. 그런데 기초는 기초일 뿐이다. 건물을 올리기 위한 기반이다. 건물을 올리기 위해 기초를 닦는 것이지, 기초 닦기가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새로운 삶을 살아냄에 있어 충분히 주저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주저하며 주저 앉으면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닦았으면, 기초만 닦지 말고 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맥상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복음을 듣는 자에 복음을 살아내는 자, 복음을 전하는 자, 복음을 전수하는 자”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숙함이란 들은 복음대로 살아내는 인내의 시간을 충분히 견디며 더 나아가 복음을 들은대로 전하는데 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내가 복음을 듣고 살아내며, 전수하는 것 까지 잠시의 주저함이 있을 수 있지만, 물러나지 않아야 하리라… 생명은 전진성을 가진다. 살아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 안의 복음이 이렇게 역동하여 성장하고 성숙되기를 기대해 본다.



3.똑같이 내리는 비를 맞아도(6:4-8)
오늘 진리의 빛을 받고, 하늘의 축복을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고, 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우리를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이 되고 인격이 되고 문화로 자리 잡지 않는다면, 언제든 우리는 내 믿음과 지식을 배반하는 자리에 가 있을 수 있다.

저자의 단호한 경고이다. 성장하지 않는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게으름과 미성숙함은 복음이 주는 선물을 경험 하고서도 복음을 버리고 돌아서는 배교에 이를 위험이 있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배우며 성장하지 않으면 도리어 말씀은 차츰 내 안에서 영향력을 잃는다.

더 나아가 말씀을 아는 지식이 정체 된다면, 신앙 생활이 아닌 종교 생활을 이어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잘못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우려에 대해 저자는 한 가지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경고한다.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 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새번역_6:7-8)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해서 절로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좋은 땅이기에 가시와 엉겅퀴도 잘 자란다. 땅이 좋다고 좋은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그 땅을 경작하는 자들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에 달려 있다.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으름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야 한다.



나는?
-둔함, 초보, 젖, 어린아이…. 구원 받음이 목적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신다. 구원 받음은 결승선이 아니다. 기초다. 출발선이다. 구원 받음이 결승점이 된 신자들에게 초보(기초)의 개념이 아닌 완성의 개념이기에 성숙함에 대한 동기부여가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회개와 믿음, 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과 같은 기초(터)와 같은 지식도 일천하다면, “둔하고 둔한” 상태에 자신을 내버려 둔 것이나 다름 없다.

-듣는 것에 둔하다는 것은 청각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반응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지적 이해”와 믿음으로 순종 하는 행함이 없는 “둔함” 마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성장과 성숙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다. 오늘날 구원의 확신만 강조하여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둔함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는데, 초보(기초)적인 말씀을 이미 들었음에도 또 가르침이 필요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미 들은 초보(기초)적인 말씀은 회개와 믿음, 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 등이며, 이와같은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중의 기초임에도 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어야 할 충분한 시간 동안 신앙생활하였어도 오히려 퇴보하여 다시 초보(기초)적인 가르침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구원의 빛을 받았고, 성령의 은사와 말씀의 능력도 맛보았지만(6:4-5), 타락(배교)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은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씨름 하며, 삶 속에서 순종 하기 위해 부지런히 적용(훈련)하지 않은 (영적) 게으름이 가져 온 비참한 결과다.

-이는 마치 똑같이 내리는 비를 맞아 흡수하는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채소(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지, 가시와 엉겅퀴를 거두게 될지는 밭 가는 자들의 수고와 성실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땅의 기운도 북돋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지만, 그 기막힌 땅에서 좋은 열매를 거두게 할 지,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하도록 내버려 둘지는 농부의 손에 달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땅이어도 좋은 땅일 수록 가시와 엉겅퀴도 무성하게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주님, 기초만 닦는 젖을 또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겠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되겠습니다.
*주님, 은혜로 주신 좋은 땅에서 신앙의 열매 가득 맺히도록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겠습니다. 행동으로 순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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