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멜기세덱과 예수님 [히 7:1-10]
 – 2022년 07월 09일
– 2022년 07월 09일 –
멜게세덱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논증한다. 사실 인간의 이해 능력과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신다.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 예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알 수는 없다. 본문은 다만 멜기세덱을 통하여 예수님의 일부라도 알 수 있도록 배려한다.


저자는 멜기세덱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평강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1절) 이다. 그의 이름은 “정의의 왕, 평화의 왕” 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2절). 그에게는 부모도, 족보도,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3절)”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다.

그의 위대함은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칠 정도였다(4절).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레위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율법을 따라 십분의 일을 받아 들이라는 명령을 받았다(5절).

하지만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족보에 들지도 않았지만,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를 축복해 주었다(6절).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의 조상들이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있을 때 이미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다.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십일조를 받은 것이다. 또,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으니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존재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원형이므로 더 섬기고 사랑해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구원할 것을 영원 전에 계획하신 대로, 역사 가운데 멜기세덱을 모형으로 세워 메시아의 등장을 예고하였다(창 14:17-20).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멜기세덱의 원형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같이 “정의와 평화의 왕”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전한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고 거기서 영원한 안식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


저자는 예수님이 말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시 110:4) 대제사장이 되신 위대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심을 증명했다. 레위 자손의 반열을 따른 제사장들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닌 보통 사람’이나,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신비한 존재”로서 영원토록 있는 제사장이시다.

제위 제사장들은 족보를 따라 혈통으로 제사장이 되고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받았지만, 멜기세덱은 족보도 초월하고 율법도 있기 전에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같이 바친 셈이 된다. 또, 축복은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법이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보다 높은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의 원형이 된다.



히브리서 묵상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경이 기록된 시기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와 상황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지만, 첫 번째 수진자들에 대한 이해, 그들이 어떻게 이 성경을 읽었을까를 놓치면 그 흐름과 교훈에서 벗어날 위험이 크다.

성경에서 멜기세덱은 매우 낯선 인물이다.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편에만 기록 되어 있기에 참고를 할 만한 자료조차 희소하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받아든 첫 독자에게 멜기세덱은 생소한 존재가 아니었다. 주전 2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유대사회에 영얗력을 끼치던 쿰란 공동체의 문서에는 멜기세덱을 천사로 묘사하였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1세기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멜기세덱을 의의 왕, 예루살렘의 첫 번째 왕이라고 언급했다. 1세기 유대인들은 멜기세덱이 상당히 영향력있고 친숙한 존재였던 것이다.

시편 110:1, 4절은 장차 오신 메시아에 대한 표현이었다. 창세기 14장에서 등장하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조카 롯이 4개 부족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출정하여 그들을 뒤쫓아가 구해내고 각종 전리품을 챙겼다. 이렇게 개선하여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맞이했다. 성경은 이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창 14:18)”으로 소개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선뜻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쳤는데,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등장한 멜기세덱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예표로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멜기세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미 5장에서 이에 대에 말하려다가 “듣는 자들이 둔하여 알아듣지 못함(히 5:11)”으로 인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멜기세덱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다.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 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고 대부분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면 이 핍박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 다수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런 분위기를 저자는 “배교”라고 표현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자신들의 시조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분은 멜기세덱이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다(6-7절). 그런데 저자는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시니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더 높고 위대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것은 레위에게도 십일조를 받은 것인데,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의 효력이 그의 후손인 레위에게도 그대로 미치기 때문이다(9-10절).

이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도 예수님의 위대함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잘 알아야 했다. 멜기세덱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통해 멜기세덱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해석된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님이 더 선명하게 해석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멜기세덱이 이해가 되고, 멜기세덱을 이해하면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통해 멜기세덱이 해석되고, 해석된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더욱 선명해 진다…. 마치 말씀이 말씀을 해석하여 더 풍성한 이해가 일어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예수님이 나의 삶을 해석하면, 해석된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더욱 선명해지고 더 풍성한 은혜가 넘친다 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하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해석하면, 해석된 나의 삶에서 말씀이 더욱 풍성하게 해석되는 이치다. 이 짜릿한 기쁨이 말씀안에 더욱 거하게 한다.



**주님, 예수님을 통해 해석된 멜기세덱이 도리어 예수님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말씀이 나의 삶을 해석하여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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