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 아비의 그 아들들…. [삼상 2:22-36]
 – 2022년 05월 12일
– 2022년 05월 12일 –

엘리가 매우 늙었다. 두 아들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을 뿐 아니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행음 하였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던 그들의 삶이 경건할 리 없었다. 회막문 앞에서 하나님을 멸시하며 행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겨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것으로 자신들을 살찌운 엘리 가문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기가 찬 엘리 제사장 가문의 악행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사무엘은 어려서 부터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으며(26절)” 자라났다.



1.아무리 사사시대 라고 하지만…(22-25절)
엘리가 “매우 늙었다(매오드 자켄)” 육체적으로 늙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도 “매우 무력하다”는 의미다. 두 아들들이 회막문 앞에서 벌인 해괴망칙한 일을 “듣고서도(22절)”, 백성들의 입을 통해 그 아들들의 악행을 “들었어도(23절)” 엘리는 하나님 앞에 통탄하며 절규하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훈계만 할 뿐이었다.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스스로 나실인으로 맹세한 여인들(민 6:2)로서 회막 입구를 청결케 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이들로(출 38:8) 보인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 여인들과 동침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가나안 종교 제의를 모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가나안 종교는 공식적인 “성전 창기”를 두고 제의의식의 하나로 성교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것을 모방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17절) 했을 뿐 아니라 가나안 종교의 제의 의식까지 따라 행하였던(22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로 찾아오는 백성들과 회막문 앞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에게까지 온갖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에 대하여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토로하였다. 하지만 엘리는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며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통회하며 회개해야 함”에도 그저 경고와 권면만으로 갈무리한다. “24 이놈들아, 당장 그쳐라! 주님의 백성이 이런 추문을 옮기는 것을 내가 듣게 되다니, 두려운 일이다. 25 사람끼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중재하여 주시겠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변호하여 주겠느냐?” 아버지가 이렇게 꾸짖어도,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새번역_24-25절).”

*신명기 21:18-21에서는 자녀의 죄를 끊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부모의 책임을 말씀해 주셨다. 순종하지 않는 자식에 대하여 엄한 징계를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엘리가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그저 말만 했다…. 엘리의 영적 무지와 무감각이 아무리 사사시대라고 하지만 기가 막힐 뿐이다.


하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엘리의 경고와 권면을 가볍게(?) 무시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25절 하)”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의 하나님께서 심판을 결정하신 것이다. 이에 완악한 마음을 결코 돌이키지 않았다.

*두 아들들은 아버지 엘리의 말도 듣지 않을 만큼 완악 했다. 아버지의 말을 그리 가볍게 여기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듯 하다. 기고만장하여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사시시대의 암울함은 성전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성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암울함이 교회라고 비켜가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그래서 엘리와 두 아들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두렵기만 하다…. 할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저 납작 엎드려 “주님, 살려주십시오… 주님, 도와주십시오” 라고 되뇌이게 된다….. 그저 매달릴 뿐이다…. “주님, 한국교회를 살려 주십시오…..”


*”한편,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새번역_26절).” 예수님께서 자라나실 때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는 말씀이 그대로 생각난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로 죽음을 향해 빠져들고 있었지만, 사무엘은 생명력 있게 그들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고 있었다.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은총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은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와 두 아들들을 바라보면 슬프셨지만, 사무엘을 보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무엘의 자람은 보기에 좋았다.

*참된 성장과 성숙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며 함께 간다. “키”에만 성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도 성장이 있다. 예수님의 성장을 “지혜와 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허투루 쓰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키가 자라는 것에서 성숙과 성장이 함께 일어나야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2.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 하리라(27-36절)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엘리는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이다.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지 않은 제사를 드리다가 불에 타 죽은 후 셋째 엘르아살과 함께 두 제사장 그룹으로 계승 되어 왔다

그런데 제사장 집안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특권의 자리에서 추방하신다. “…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30절)”는 선언을 하시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만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새번역_30절 하).” 라고까지 하셨다.

*집안의 팔을 끊어 노인이 없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이 예언은 이후 70여년이 지나 다윗이 사울왕에게서 도망다니던 시절, 놉 땅의 제사장에게서 진설병을 얻어먹고, 골리앗의 칼을 얻은 이후 격분한 사울왕에 의해 제사장과 제사직에 관여하는 이들 85명과 그 마을을 도륙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 이다말 계통의 제사장은 모두 학살 당한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아비아달”이 용케 빠져나와 다윗에게 합류하고 이후 6년 동안 다윗의 제사장이 되어 충실하게 따라다니다가 다윗의 노년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킬 때 요압과 함께 동조했다가 솔로몬에 의해 아나돗으로 추방당해 근근히 살아가게 된다. 이때 “그 때에 너의 집에서 살아 남는 자들은, 돈 몇 푼과 빵 한 덩이를 얻어 먹으려고, 그에게 엎드려서 ‘제사장 자리나 하나 맡겨 주셔서, 밥이나 굶지 않고 살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할 것이다(새번역_36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이 예언을 한 지 약 120여년 후에 이루어졌다.

*이 모든 예언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20여년이 지난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 “자기 소견”을 따라 하나님의 법궤를 임의로 가지고 나갔다가 참패를 당하고 법궤는 빼앗기고 둘은 함께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이것이 엘리 가문에 선언된 예언이 반드시 성취되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36절) 재차 확인하셨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고 억압하며, 가나안 종교의 형식과 섞어서 행음한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엘리의 집안은 이렇게 하나님께 심판 당하고 만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단지 두 아들들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29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나에게 바치라고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⑨멸시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 ⑨사해 사본과 칠십인역에는 ‘탐내느냐?'(새번역_29절)”

그렇다!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소중하게 여겨,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가운데서 좋은 것만 골라 아들들을 살찌운 엘리를 강하게 질책하신다. 여기에서 “좋은 것”이라고 번역된 “레쉬트”는 “첫째, 처음, 시작, 최초, 최상의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서 가장 처음 것, 최상의 것만 골라서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취하는 멸시함을 엘리가 두 아들들에게 보인 것이다.

*두 아들들의 하나님을 멸시함은 아버지 엘리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었다. 엘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은 듯 했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가 두 아들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처음 것, 최상의 것)을 “자기 소견”을 따라 임의로 가져와 “살지게(바라_만들다, 창조하다)” 한 것을 정확하게 보고 계셨다.



3.그러나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35-36절)
엘리 제사장의 집안이 심판을 당했다고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제사장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충실하게” 제사장 직을 감당할 이를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백성들을 이끌 제사장이다.

당장은 사무엘을 세우시지만, 장차 엘리 계열의 제사장 그룹이 심판 받아 물러나고 세워질 “사독 계열” 제사장 가문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늘 앞서 가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 하신다.



나는?
-결국 “그 아버지의 그 아들들”이었다. 아들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완악하게 행하는 것은 아비의 모습에서 보고 배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제물을 마음대로 “밟으며(바아트_밟다, 차다_하찮게 여긴다는 의미)” “자기 눈에 좋은 것, 자기 마음대로” 취하여 아들들에게 먹인 엘리의 모습을 아들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산 것이다.

-엘리 아들들의 범죄는 아비의 범죄, 가문의 문제였다. 엘리는 제사장 가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들(27-30절)을 하찮게 여겼다. 단지 좋은 것을 취하는 수단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은 듯 하다. 백성들의 시선에 감추어진 성소 안에서의 엘리의 모습을 두 아들들은 분명히 보고 자랐을 것이다. 엘리는 보이지 않게 하나님을 멸시했지만, 두 아들들은 노골적으로 백성들 앞에 드러내며 무시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 두 아들들의 죄악에 대하여 “죽이기로” 결심하셨지만, 이후 20년 동안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20년 이라는 회개와 돌아섬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며” 더욱 더 죄악의 늪에 끌려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사시대의 진정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조차도” “가벼이 여기고” “자기 생각과 소견을 따라 무시하고 멸시하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엘리가 매우 늙었다는 표현은 “심판”의 메세지 앞에서도 반응할 여지도 없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디어진 감각을 가리키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20년의 기회를 허무하게 보내다니….


*하지만 하나님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을 포기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기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도,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합한 백성”으로 되돌리기 위해 움직이신다. 열심을 내신다. 가장 먼저 제사장부터 만지실 것이다. 엘리와 두 아들들의 기행에 가까운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환경 속에서도 “사무엘”이 깊은 어둠의 하늘을 빛내는 별처럼, “하나님과 백성들의 보기에 좋게(토브)” 자라나고 있었다.


*엘리의 뒤를 따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무엘의 자라남이 나의 자라남이었으면 좋겠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이 마음이 만족 되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만을 소통 시키는 그런 자라남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사사시대의 진정한 아픔은 “기회를 줘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았지만, “자기 소견”에 충실하여 존종하지 못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삶에서 진리의 지식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진리의 지식보다 당장 현실의 생각, 소견,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결정한다. 이런 세태가 사사시대의 전형이었다.



*주님, 지금이 사사시대와 같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존중하고 따르겠습니다.
*주님, 감춰져 있던 엘리의 하나님에 대한 멸시가, 아들들을 통해 노골화 된 것을 봅니다. 저는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모습을 충실하게 지켜 보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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