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첫 언약의 한계, 완전한 새 언약의 필요성 [히 9:1-10]
 – 2022년 07월 13일
– 2022년 07월 13일 –
새로운 대제사장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모세를 통해 세워진 성막의 모습과(1-5절) 그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사역(6-7절), 그리고 첫 언약에서의 제사장 사역을 평가한다(8-10절).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며 옛 언약이 가지는 제사의 역할이 가지는 한계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 장막은 현 시대를 상징(비유)합니다. 그 장막 제의를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런 것은 다만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과 관련된 것이고, 개혁의 때까지 육체를 위하여 부과된 규칙들입니다.”(새번역_9-10절)

“상징(비유_9절)과 예식(예법_10절)”은 흠이 있는 제사장들을 통해 드리는 제물과 제사는 불완전하기 마련이지만 이를 통해 매일, 혹은 매년 드리게 하여 죄 용서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주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을 미리 보여 주시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를 다루시는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개혁”할 때가 왔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상징과 예법(모형과 그림자)는 원형과 실체가 개혁(완성)한다. 제사장들의 짐승 제사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개혁된다. 대제사장은 율법대로 피의 제사를 드리고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의 행동(삶)이 그를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다(9절)” 그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죄가 없으시나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심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가르셨다. 막힌 담을 허셨다.



1.모세의 성막이 보여 주는 분명한 한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성소는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주신 곳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과 동행하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징표였다. 이곳을 통해 잇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성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다.

성막과 그 안에서 행한 모든 의식의 핵심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교제이며 관계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소의 하나님은 찾아가서 예배 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 넘어서는 분으로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초월의 존재임을 보여준다.

성막이나 성전, 제사장, 제물 자체가 손으로 지은 성소의 한계를 스스로 보여준다. 그것은 영우너할 수 없고 임시적임을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 제도와 형식을 원형 그대로 보전하고 지키는 것에 집착한다면 성소를 주신 원래 의도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대제사장만 1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의 존재는 성막의 형태가 존재하는 한 성소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날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재 예수님을 통해 누리는 온전한 성막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비유)에 불과하다.



2.한계를 보여주는 목적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다. 그곳의 구조와 기구들을 통해 정해진 제사 예법을 따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대체할 수 없는 방법을 주셨다. 하지만 이것은 새 언약을 설명하기 위한 이해의 도구 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정한 완벽한 구조와 예법과 형식을 따라 행한들 그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분명한 한계다. 분명한 한계임에도 이를 먼저 주신 이유는 이후에 오는 새 언약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제사 예법에 담긴 새 언약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목적이 있다. 첫 언약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8절). 하나님의 허락 하심에 따라 일년에 한번 이루어지는 것 뿐이었다(7절).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원리를 알려주기 위한 것일 뿐 완전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는 “가르침”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육체의 예법을 “개혁” 하는 것은 당연히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새롭게 살아있는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여셨다가 아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는 것(8절)”이다. 즉 주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이다.

첫 언약이 비유로서 새 언약이라는 진리를 가르침이 목적이라면, 육체의 예법을 개혁하는 것은 주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비유’는 성숙함으로 나아가도록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식이라면 ‘개혁’은 알게 된 지식대로, 분별된 지각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이다.




나는?
-모세를 통해 세워진 성막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곳에서 드리는 예물이나 섬기는 자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음식법, 정결법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다. 진정한 개혁(구원)이 되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행하도록 맡겨두신 것이다.

-한계를 분명히 알 때 예수님께서 행하신 온전한 구원의 가치를 절감한다. 온전하게 구원을 누릴 때 율법과 음식법과 정결법의 한계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7, 8장에서 혈통을 따르는 아론의 후손들인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설명했다. 이어지는 8, 9장은 땅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를 구분하여 땅에 있었던 성막이나 성전의 모든 것은 하늘에 있는 참 장막, 참 성소를 위한 그림자였을 뿐 임을 증거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온전한 장막에서 드리신 완전한 희생제사를 설명하기 앞서 ‘새상에 속한 성소’와 ‘첫 언약의 예법’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땅의 성소와 제사 제도, 음식법과 정결법 등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다. 성막과 성소, 지성소, 그곳에 있던 기물들, 제사장들의 매일 하는 봉사, 매년 거행되는 대속죄일 예식등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가 하신 약속에 대한 굳은 신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임시적이었고, 한계가 분명하다.

-성막과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바라보게 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실 완전한 구원을 누리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도록 도와 주신다.

-땅의 성소와 첫 언약의 예법은 은혜이기도 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땅의 성막과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육체에 의식상의 정결을 가져다 줄 뿐 양심을 온전하게 해 주지 못했다. 더구나 그 때는 참 장막인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길도 계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옛 언약을 통해 새 언약의 완전성을 기대해야 한다. 새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완전하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한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인생의 은혜임을 인정합니다. 한계 너머, 완전하신 은혜의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그림자는 실체가 아님을 압니다. 그림자 답게 살며 실체 되신 주님을 드러내겠습니다. 더 예수님처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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