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수님의 피 흘림, 완전한 구원 [히 9:11-22]
 – 2022년 07월 14일
– 2022년 07월 14일 –
첫 언약의 제사 제도에 대한 한계를 지적한 후에 예수님의 완전한 제사와 그 효과를 설명한다. 그리고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왜 필요한지 밝힌다. 먼저 11-15절은 새 언약의 우월성에 대하여 핵심을 골라 제시하는데, 8장 1절부터 10장 18절까지의 주제 단락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새 언약에 따른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대제사장이시다(15절).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첫 언약에 속한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더 뛰어나고 완전하다. 16-22절은 언약과 죽음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예수님의 피는 새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만족 시키는 귀중한 목숨값 이기에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가 되신다.

구약의 제사장들과 예수님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몰론 사람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말할 나위 없지만, 주님께서 감당하신 속죄 사역은 제사제도와 제사장들이라는 모형과 그림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원형’과 ‘실체’가 분명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1.’장래 좋은 일(완전한 구원)’의 대제사장(11절)
주님은 만물을 회복시키고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구약의 율법을 따라 정해진 제사장 제도이다. 제사장들은 죄의 용서를 위해 율법에 따라 특별한 직무를 맡은 자들이다.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도록 하나님 앞에 세우는 자들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식을 따라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백성이 “이미 지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나올 때 그 일을 정해진 율법의 형식을 따라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중재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제사장들은 과거의 죄에 대해 제사를 통해 임하는 용서를 보여 줄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래 좋은 일(완전한 구원)”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의 무죄 판결은 이 땅에서 손으로 지은 곳에서(11절) 이루어지는 제사가 담보해 주지 못한다.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 이루어 질 일이다.

*이 땅의 제사장들은 해줄 수 없는 일,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 ‘장래의 좋은 일, 즉 완전한 구원’을 위해…



2.어떻게 가능할까? – ‘오직 자기의 피(12절)’
‘장래의 좋은 일’을 어떻게 이루실 수 있는가? 율법에 따라 과거의 죄를 속하는 방법인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다. 첫 언약에서도 사함과 정결의 형식으로 주신 것이 제물의 피를 뿌리는 것이었다. 모든 육체와 성소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그 제물의 피로 정결하게 되었다(19-21절).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렇게 첫 언약을 맺을 때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반복되어야 했다. 그 정결함은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정결함이었다. 문제는 이 제사가 매일, 매년 반복 된다는 점이다. 제사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제사는 반복될 뿐이다.

제물의 피가 가지는 분명한 한계에 비해 주님은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12절).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물의 피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타락 이후 만물이 죄의 저주 아래 있다. 인간을 위해 대신 드리는 짐승도 모두 흠이 있다. 흠이 없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죄를 해결할 방법은 피를 흘리는 것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는 완전한 예수님의 대속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며 주님이 흘리신 피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

“흠 없는” 제물이어야 완전한 대속을 이룰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실 수 있다(14절).



3.단지 죄 사함 뿐인가?(14절)
흠 없는 주님의 피가 완전하게 이루신 구원이 구약의 제사와 다른 본질적인 것은 ‘장래의 좋은 일(완전한 구원)’이라 했다. 이는 이제 죄 용서를 받은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시사한다. 그래서 본문도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의 죄를 용서 했다’로 기록하지 않았다.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4절 하)”로 이어진다.
과거의 죄에서 자유(깨끗)하게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심판까지 유효한 영원한 속죄인데, 이는 단지 장래의 차이 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변화도 분명하게 말한다. 이는 “죽은 행실에서 깨끗”해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장래에 말할 수 없는 구원의 영광을 선포하며 이것은 영원한 기업의 약속(15절)을 바라보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을 장래에 받게 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삶의 현장에서” 먼저 누리게 하신다.

주님의 흠 없는 제물 되심으로 흘리신 주님의 피가 나에게 주시는 은혜는 단지 장래의 구원의 보장뿐 아니라 이 구원의 확증이 나의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죄에서의 자유함(죽은 행실에서 깨끗해짐)과 하나님 안에서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오늘 충분히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깨끗해진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함과 기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곧 영원한 용서를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확증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속죄가 이루는 장래의 좋은 일은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섬기며 사는 것으로 증명된다.



나는?
-그 피로 누리는 오늘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섬기는 기쁨이다. 단지 과거의 죄 문제가 해결된 차원이 아니다. 현재가 없는 장래만의 구원도 아니다. 제사장들처럼 장래의 문제에 전적으로 무능한 채 현재만의 평안에 답보 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영원한 속죄가 이루신 장래의 좋은 일은 과거의 죽은 양심을 살릴 뿐 아니라 장래의 좋은 일도 약속하며 오늘을 살며 지금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 오늘을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생각과 행동은 구원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완전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단번에 드린 피 흘림으로 이루어진다. 그 피 흘림으로 인해 깨끗함을 입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주님, 주님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동행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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