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울어진 운동장…. [요 5:30-47]
 – 2022년 01월 17일
– 2022년 01월 17일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언해 주는 이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어떤 증언에도 유대인들은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들의 삶과 마음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기를 증거 하셨다.


1.세례 요한의 증언(33-35절)
세례요한의 사역에 백성들이 열광하자 그들(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보내 검증했다. 그들은 요한의 사역에 한 때 긍정적이었다(35절). 요한이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잠시 여긴 것이다. 사람의 증언이 필요치 않는 주님이셨지만,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은(34절) 기꺼이 세례요한의 증언을 활용하신다.

특히 세례요한이 주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1:19-27) 그들은 그의 증언을 들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어둠 속에서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었고, 그들도 잠시 그 빛으로 인해 즐거워하기 원했다(35절) 요한이 메시아이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켜서 비추이는 등불”과 같은 존재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서 참 빛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의 등불을 먼저 켜서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는 “작은 등불”이어야 한다.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등불” 이어야 한다.


2.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36절)
세례요한의 증언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여러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7 가지의 기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거 하는 “표적”들이다.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가며 행하셨던 예수님의 역사가 예수님을 증언한다.

이것은 요한의 증언(사람의 증언)보다 훨씬 더 큰 증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행하실 수 없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마다 이 증거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듣지도 못했다. 귀가 있고 눈이 있었지만 듣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했다.

*듣고도 보고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완고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3.하나님의 증언, 성경의 증언(37-40절)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들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부터 들려졌다(37절, 마 3:17; 막 1:11) 이를 통해 이미 증거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경험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었다.

기록된 말씀을 믿지 않기에 직접 들려준 증거도 외면하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믿지 않기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드러내 보여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없다(깨달을 수 없다).

*성경을 연구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 정작 성경에 기록된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완고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4.기울어진 운동장, 결코 믿지 않는 유대인(41-47절)
세례요한의 증언, 성경(구약)의 증언,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기적들의 증거가 넘침에도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다. 주님은 이들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고발하신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보이는 이런 완고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그 말씀”이 그들 속에 하지 않는다(38절).
두 번째는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오지 않는다(40절).
세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42절).
네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만 구한다(44절).

*충격적이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들은 구구절절 예리하게 그들의 마음을 찌르셨다. 무엇보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모든 율법들을 힘겹게 지켜왔고 그 율법들을 더 잘 지키기 위해 율법보다 더 많고 복잡한 “장로들의 유전”까지 만들어 열심히 지켰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열심을 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힐난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선언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새번역_44절)” 서로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영광에 취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이 땅에서 충분히 영광을 받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곰곰히 생각할 수록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되뇌여 진다.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에는 익숙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격려와 축복은 구하지 않는다. 사역의 현장에서 서로 서로 인정해 주면서 만족함을 느끼지만 하나님의 인정과 만족함을 구하지 않는다.

*지금 잘 되는 듯한 것에 취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도움을 구하는 것에 인색하고 그나마 구한다 치더라도 매우 형식적인 것에 머문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만큼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더욱 구하는 것이 인색하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성도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에 갈급한 것보다 하나님의 격려와 칭찬을 사모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서 다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의 걸음 안에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는지 돌아보아야지….


나는?
-그들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자기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를 제시하여도 이를 “확증편향”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 졌다. “사람들에게서 인정과 칭찬 받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 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일, 훈련을 너무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 되었고 너무도 확연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다.



*주님, 자기영광 자기만족에 취해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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