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미적거리다 왕으로 추대되었다. 어쩔거니? [삼상 10:17-27]
 – 2022년 05월 23일
– 2022년 05월 23일 –

미적거리는 사울이었지만, 결국 왕으로 추대(?)를 받았다. 제비뽑기를 통해서 였다. 사울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제비 뽑혀 지기까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이끌려 나오는 사울이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고 사무엘이 “주님께서 뽑으신 이 사람은 온 백성 중에 이만한 인물이 없다”고 말하자, 온 백성이 환호성을 지르며 왕의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이를 보면서 몇몇 불량배들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겠나!”하고 떠들면서 사울을 업신 여기고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 사울은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였다.

사울이 여호와의 영에 강력하게 감동 되었어도 블레셋을 치지 않고 불순종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큰 감동을 받았으나 주저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그의 불순종에도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신뢰하는 제비뽑기의 방식을 통해 “여호와의 영이 임한 강력한 감동에도 불순종하여 의기소침해 있는” 사울을 불러 내신다.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서 제비뽑기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를 백성들이 끌어낸다.



그런데 참 의아하다. 그렇게 이끌어낸 사울의 헌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를 보고 백성들이 환호한다. 그리고 “지도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과 달리 블레셋의 왕정을 꿈꾸고 바라는 백성들은 사울을 “왕”으로 호칭하며 환호성을 올린다. 허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백성들은 왕을 세워야 한다는 왜곡된 마음에 확증편향되어 제비 뽑힌 인물이 짐보따리 사이에 틀혀 박힌 채 자신의 왕 됨을 외면하고 있어도 그를 이끌어 내고서 키와 용모 만으로(참고_삼상 16:6,7) “왕의 환호”를 외치고 만 것이다. 이 환호가 절규로 변하게 될 날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망정 담담히 라도 서 있어야 했던 사울은 첫 번째 불순종에 마음이 걸려 있는지, 짐보따리들 사이에서 스스로 나오지도 못한다. 안타깝다.

사울은 명백히 왕이 되는 것을 꺼려한 듯 하다. 여호와의 영이 충만하여 길갈로 내려 갔어야 했을 그의 걸음이 고향 기브아로 향했고, 돌아온 집에서 숙부의 질문에도 당당하게 기름부음 받은 것을 말하지 못하며, 사무엘이 미스바로 온 백성을 소집할 때에도 이 모든 일을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은 채 모든 백성들이 왕을 고대하며 제비뽑기에 열중할 때 무심하게 짐보따리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추대된 왕 이기에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일부 백성들의 불평과 노골적인 비아냥과 무시를 사울은 애처 못들은 척 하였다(27절).

이런 사울이 왕이라니….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직하게 사울을 “지도자”의 자리에 이끌어 내신다. 기다리시며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 틀림없다.



*또, 사무엘은 여전히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한탄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애굽인의 손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 주었지만,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왕을 세우라고 한다고 통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비뽑기”로 사울을 왕의 자리로 세운다.

사무엘이 대단하다. 자신의 상한 마음과 별개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 한다. 기름을 부었던 사울의 불순종에도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어떤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할 뿐이다. 하나님의 의지대로 이끌 뿐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을 덧입히지 않는다. 사무엘이 대단하다.

인간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뜻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길이 있음을 인정한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다.



나는?
-주저하고 미적 거리는 사울에게 기회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울을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세우시겠다는 확고한 의지에 변함이 없다. 연약할 수록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드러날 것이지만, 사울의 지도자 됨에 대한 스스로의 미적거림은 너무도 아쉽기만 하다. 하나님께서 뭐가 아쉬우셔서 이런 이를 “지도자”로 세우신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그래서 하나님의 기다려주심, 포기하지 않고 맡겨주심이 감동이다. 나에게도 인생의 걸음 걸음 가운데 이런 기다려주심, 포기치 않으심의 은혜가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를 충분히 기대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사울에게 보이신 기다림과 포기치 않으시는 은혜를 나에게도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에게 베푸셨다면 나에게도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미적거리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갈 수록, 불러 만 주신다면, 아니 부르심을 받은 이를 돕는 자리에라도 나를 부르신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갈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기를 기대한다.

-그렇기에 피하기만 하는 것은 너무도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울은 그렇게 장대한 기골을 가지고서 짐보따리 사이에 웅크려 있었다.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 나도 혹시 나의 외모에 맞지 않게 웅크려 있다면 얼마나 기가 찰까…. 주님의 말씀과 부르심 앞에 웅크리지 말고 담대하게 응답해 보자…..

-한편으로 키와 외모 때문에 짐보따리 사이에 웅크려 있다 나온 사울의 주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백성들의 안목이 아니길 바래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세워야 한다는 확증편향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명의 부르심을 피해 짐보따리 사이에 웅크려 있는 사울의 내면을 보지 못했다. 그의 성품을 간파하지 못한다. 아니 워낙 출중한 외모 때문에 그것을 외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의 성품, 내면의 모습은 보지 않은 채 외모와 화려한 이력만으로 평가하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모든 것이 결정이 났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결정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판단한 안목으로 반대하고 나선다.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뜻을 이루기 위해 힘을 써도 모자를 판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하고 폄훼 한다(26-27절). 이런 이들을 사무엘서의 저자는 “불량배들”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혹시 영적 불량배가 아닐까? 하나님의 결정을 나의 마음과 생각에 비추어 반대하고 불평하는 모습은 없었을까? 하나님 앞에서 그런 불량배의 모습이 없었을까? 적어도 “마음에 하나님께 감동하여 사울을 따라나서”지는 못할 지라도 불평만 해대는 불량배는 되지 말아야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깊이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더 신뢰하고 담담하게 기도해야지…. 주님, 이 나라가 모든 면에서 퇴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주님, 미적 거리는 사울의 모습에서 저의 영적 미적거림도 생각이 납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결정을 반대만 하는 영적 불량배가 되지 않겠습니다. 결정하신 뜻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편에 늘 서겠습니다. 통찰력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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