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제사) [히 13:1-17]
 – 2022년 07월 25일
– 2022년 07월 25일 –
새 언약 백성은 믿음과 인내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함을 권면했다. 그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담대히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라고 촉구한다. 저자가 권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무엇일까?



1.일상에서(1-6절)
사랑(1절)과 섬김(2절), 공감과 이해(3절) 정결하고 거룩한 삶(4절), 믿음에서 오는 자족과 감사(5절)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이다. 형제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거룩과 화평의 삶을 살라는 것의 연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홀로 견디는 삶 이기보다 함께 돌아보아 직면한 핍박을 이기도록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줄은 쉽게 끊어지지만,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공간을 초월한 섬김의 사랑을 주저하지 않았다. 핍박을 받아 갇힌 그리스도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우상숭배의 영향 아래에서 간음은 일종의 문화 였다. 제의 의식으로서 성행위는 일상의 거룩함을 지키는데 매우 큰 걸림돌이었다. 얼마든지 쾌락의 종으로 음란하게 살 수 있는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정결한 삶에 대한 확고한 가치를 붙잡는 사람들 이어야 했다. 그 첫 걸음은 정결한 삶과 구별된 결혼을 공감하는 믿음의 결혼이었다. 무엇보다 음행과 간음은 세상은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여기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알고 두려워 해야 한다.

말씀에 대한 두려움은 삶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엇보다 밀려오는 고난 속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 했듯이 일상에서 위와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가르치신 대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의미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시편 118:6-7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격려한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c”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c 시 118:6, 7(칠십인역))_(새번역)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일상에서 힘겹게 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살아내야지… 새 언약의 백성은 당연히 그리 해야지….

*살아내게 하는 것은 “생각”부터 시작한다. 본문은 ‘잊지 말라’, ‘생각하라’, ‘보라’와 같은 동사들을 사용하여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특히 “생각(밈네스코)”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였는데(3, 7절)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를 공동체 안에서 갇히고 학대 받는 자들에 대하여(3절),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에 대하여 사용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결국 말씀을 “기억하여” 일상에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임을 드러낸다.

*선포되고 가르쳐 지는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그 말씀을 기억하여 “말씀대로”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추구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공동체 안에서부터 세상을 향하여 선한 영향력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2.공동체 안에서(7-15절)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태도는 말씀을 가르쳐준 지도자들의 삶과 죽음을 살피고 그 믿음을 본받는 것과(7절) 자도자들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한결같기에(8절) 여러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삶이다.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의 규정들로 마음이(믿음이)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예수님의 은혜로 튼튼해 지는 것이다(9절).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임으로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살아낸 삶을 우리도 본 받으며 살아내야 한다.

유대교의 성전과 제단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제단에 놓은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다(10절). 속죄제물로 드려지는 피는 지성소에 몸은 진영 밖에서 태운다(11절).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12절). 그렇기에 믿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기 위해 기꺼이 진영(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13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끊임없이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15절). 이것은 유대교에서는 짐승의 피로 성막 내부만 정결해 지지만, 예수님은 진 밖에서 피를 흘리셨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의 효력은 성전 안에서만이 아니라 성전 밖에(영문 밖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제 성전 안(진 안)에서의 의식이 폐지 되었으니 진 밖에서(영문 밖에서) 예수님의 수치를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새로운 예배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당당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증언하는 찬송의 제사, 선행과 나눔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이렇게 사는 이가 영구한 도성, 즉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16-17절)
두 가지를 언급한다.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눔의 삶이 첫 번째이고 다음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복종하여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정산해야 하기에 마땅히 이런 자세를 취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 많이 세워지도록 충실하게 사역 하는 지도자이고 싶다.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는 삶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지도자들을 존중하여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도록 배려 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율법주의의 영향을 따라 형식과 제도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로 누리는 모든 것을 가치있게 지켜내는 삶이다. 그것은 사랑하고 섬기며, 공감하고 희생하며, 지켜야 할 가치를 굳게 지키는 “삶”이다.

영문 안은 옛 언약, 율법의 질서가 작동 되는 곳이다. 또한 보편적으로는 (물직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이나 공동체(교회, 교회당) 안이라고 보면 될듯하다. 그렇다면 영문 밖은 이와 같은 안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가치가 지배하는 곳, ‘세상’이다. 오늘날 선교의 현장, 세상으로 나가서 예수님처럼 살아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받는 조롱, 치욕, 고난, 환난, 핍박을 인내하며 예수님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영문 밖, 그 곳에서 끊임없이 찬송의 제사를 드려서 예수님처럼 살아내는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이다.



나는?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 예수님께 구원받은 삶 답게 살고 있을까? 나의 삶 속에 사랑, 희생, 섬김, 나눔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을까?

-히브리서의 마지막에 다다를 수록 예수님처럼 살아내는 삶이 주는 무게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 무게가 진중하게 느껴질 수록 이미 받은 은혜의 가치를 제대로 실감하고 있는 것이리라!

-예수님의 온전한 구원을 받고 누리는 사람과 공동체는 성전 안 보이지 않는 곳의 형식과 제도에 더 이상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그곳,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것에 마음을 모아 순종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 나그네를 섬기는 것, 학대 받는 자를 돌아보는 것, 지켜야 할 가치를 진지하게 고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다.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라고 굳이 연결한다. 일상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를 따라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치이다.

-믿음의 삶이란 예수 믿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믿음을 고백한 이후에도 삶을 이어지기에 구원 받기 전의 삶과 확연히 다른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인 곧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구현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사랑은 정교한 하나님 나라의 톱니바퀴와 같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초기 기독교 사회는 거짓 교사들이 넘쳐났다. 이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충분히 흔들고도 남았다. 이런 와중에 각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순회 전도자들도 꽤 있었다. 순회 전도자들에게는 거처와 음식과 환대가 필요했다.

-성도들은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이들을 존경하여 그들이 성실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실 “말씀의 종”, 하나님의 대언자, 불의 사자”와 같은 수식어들은 낯부끄러운 것들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칭 이런 수식어로 곧잘 자신을 화려하게 꾸민다. 언제까지 이런 수식어를 맹신하고 맹목적으로 지도자를 따르는 우민화된 성도를 세울 것인가?

-설교자로서 무거운 책임감과 성실한 준비와 함께 자신만이 말씀의 비밀을 아는 것 처럼 행동하는 교만함을 경계해야 한다. 개혁주의(프로테스탄트)의 시각에서 목회자(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이런 “가스라이팅”으로 성도들을 우민화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결국 성도들의 우민화의 결과로 하나님 나라를 약화 시키는 죄를 짓는 것이다. 말씀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만 바라보게 하는 왜곡을 낳게 한다.

-교회는 유치원이 아니라 죄와 싸우는 담대한 전사를 세우는 훈련소이다. 교회라는 온실에 놓여진 화분이 아니라 들판에 심겨진 꽃과 같다. 낮의 뜨거움과 밤의 차가움, 세찬 비바람과 타는 듯한 가뭄을 온 몸으로 맞이하며 꿋꿋하게 살아내야 하는 존재다. 교회라는 훈련소에서 다지고 다져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 일상과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섬김 희생과 나눔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임을 고백합니다. 고백이 삶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나를 지도자로 세우셨으니 본을 보이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하나가 되어 저의 “삶”을 보고 따라오기에 충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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