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요 6:16-29]
 – 2022년 01월 19일
– 2022년 01월 19일 –
숨바꼭질…. 큰 무리와 주님이 숨바꼭질을 하시는 듯 하다. 벳세다 하늘 잔치를 경험한 무리는 자신들을 배불리 먹여주신 주님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주님은 묵묵히 가야할 길을 가신다. 벳세다 들에서의 오병이어 기적을 마무리하고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의 흥분과 상관 없이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다. 마태는 이때 주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했다. 산에 오르기 전 제자들을 서둘러 배에 올라타게 하고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출발 시키신 것으로 기록했다(마 14:22).


1.두려움이 기쁨으로(16-21절)
제자들만 타고 나선 뱃길에 때마침 간혹 갑자기 휘몰아 치던 갈릴리 바다 북부의 돌풍(큰 바람)이 불어 닥쳤다.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큰 바람에 맞서 노를 저었다(19절). 그야말로 사투였다. 사나워진 물결과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이 그 사나운 물결 위로 걸어오셨다.

큰 바람, 파도물결과 사투를 벌이며 십여 리(약 3.9km)를 노를 저었으니 꽤 긴 시간을 온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힘이 부칠 수록 절망감이 커져만 갔을 것이다. 아무리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어부들 이었던 제자들 이라도 이처럼 갑자기 불어닥치는 큰 바람과 파도물결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바람과 파도 속을 주님께서 걸어 오신 것이다.

*처음 그 모습을 볼 때 “두려움”에 떨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때가 다 된 것처럼 여겼을 수 있다. ‘죽음의 천사’, ‘사신’이 아닐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큰 바람과 넘실대는 파도위를 걷는 형상이라니… 그것도 밤이었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람과 파도에 잠식되기 전에 이미 깊은 두려움에 좌초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검뭇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 와서 “바람소리와 요동치는 물결 소리”를 뚫고 제자들의 귀전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 졌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절). 주님의 음성을 알아보고 순식간에 기쁨의 환호성이 터졌다. 그렇게 다이나믹한 시간의 끝에 건너 가려던 땅(가버나움)에 도착해 있었다(21절).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으나 주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 예상치 못한 돌풍을 만나고 사력을 다해 파도를 뚫으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주님이 안계신 배는 이리 저리 요동쳤다. 두려움이 몰려 들었다. 거기다 두려운 상황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뚫고 물 위로 걸어오는 거뭇한 형상에 제자들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엎친데 덮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판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큰 바람과 거센 물결에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돌풍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산 위에서 바다 가운데로” 한 걸음에 내달리셨다. 그리고 사투를 벌이면 두려움에 요동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새번역_20절)”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씀하시며 큰 바람과 물결에 두려워하는 배 위의 제자들에게 평안을 가져 오셨다.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 함께 하여 주심이 곧 평안이고 기쁨이다. 두려울 순간 더 이상 두려움에 지배 당하지 않게 하신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근심과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과 평안이 되는 것을 제자들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고 큰 바람과 파도에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새번역_20절)” 여기에서 “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고 에이미”이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밝혀주신 바로 그 이름이다. 애굽에서 이끌어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걸으며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에서 큰 바람과 파도에 절망하며 생기의 여명이 사라져 갈 때 주님은 그곳으로 찾아 오셧서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여 주심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제자들에게 들려 주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 그저 주님께서 성나게 일렁이는 물 위로 걸어오셔서 자신들을 건너편 땅에 평안히 인도한 것 만 기뻐했다. 그 와중에 주님이 들려 주신 “나다(에고 에이미)”는 듣지 못했다. 그저 주님이 오셨으니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기뻐할 뿐이었다.

*주님을 믿을 때 나에게 일어나는 급박한 일이 해결 되는 것에 평안하고 만족하여 기뻐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기뻐해야 할 것은 나의 삶에 “주님의 주님되심”이 이런 기회를 통해 분명하게 들려지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주님의 하나님되심을 분명히 보고 깨달아야 했을 제자들은 그저 주님의 노랄운 이적을 연달아 본 것에 놀라고 놀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벳세다 들녘에서 하늘의 잔치, 하늘의 양식을 건네시던 주님이 돌풍을 뚫고 물결위를 걸으시면서까지 자신들에게 오신 것 자체가 기쁨이고, 평안이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라고 그 선포하는 천사들의 외침을 놓치지 않았다. 이처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 만으로도, 오셨음을 알아채고 깨닫는 것 자체 만으로도 “두여움은 물러가고 기쁨이 찾아오는” 역사가 나를 위해 베푸신 것임을 알고 환호해야 한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임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주님이 나에게 오심, 그것 자체가 삶에서 불어닥치는 무수한 큰 바람들, 거센 파도들 속에서 사투하는 나에게 주시는 큰 기쁨과 평안임을 의심치 않겠다. 그것을 기쁘게 받아(영접하여) 누려야지!

*나를 둘러싸고 간혹 부는 광풍(큰 바람)을 주님은 쉬이 뚫고 들어 오셔서 나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을 믿는다.


2.숨바꼭질(22-29절)
제자들은 큰 바람(광풍)의 두려움 속을 뚫고 오신 주님 때문에 기뻐하며 가버나움에 도착했다. 한편 오병이어의 환상적인 기적 때문에 배부른 경험을 한 사람들은 또 예수님을 찾아 헤맨다. 그들의 어제의 기억들을 되살려 많았던 하늘 잔치가 벌어졌던 벳세다 들녘에 다시 모여 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배 한척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성들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유추하여 결국 주님을 찾아 가버나움까지 모여들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 이로다(26절)”이라고 말씀 하신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것은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 행하신 기적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빵을 배불리 먹어서 였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직언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을 “인자”가 줄 것이다(27절)고 말씀하신다. 당장 먹을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떡으로 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마 4:4; 신 8:3)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표적을 경험하고 떡에만 집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어떤 일이 하나님이 주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인지 묻는다(28절).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29절)”이 하나님의 일임을 선언하신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말씀”이다. 말씀을 먹는 방법은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주님이 곧 말씀(로고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란, 주님을 믿는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기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자신들의 삶을 책임져 주기를 믿느냐?, “주님의 하나님 되심, 구원자 되심”을 믿느냐였다. 백성들은 주님의 하나님 되심보다 주님의 배부르게 하시는 능력을 더 바랬다.

*무리들과 주님께서 숨바꼭질 하신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무리들과 상관 없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셨다. 무리들은 그런 주님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또, 주고 받는 대화의 숨바꼭질이 기막히다.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찾는다는 것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는 말씀을 주저하지 않고 선언하신다.

*주님께서 숨바꼭질 끝에 자신을 찾아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믿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즉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나는?
-연달아 표적이 일어난다. 오병이어와 물 위를 걷는 표적을 통해 “주님의 하나님되심(신성)”을 밝히 드러 내신다. 하지만 제자들과 백성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눈 앞에 펼쳐지는 기적들에 고무되어 주님을 왕 삼고자 했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단박에 해결해 주실 분명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백성들과 “숨바꼭질” 하신다. 그들의 필요와 원함, 환호성에 고무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집중하신다. 유명하게 될 수록, 사람들이 모여 들 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보아야 함을 다잡게 하는 주님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도 역시 일깨우신다. 내가 주님을 찾아다니는 숨바꼭질은 나의 만족과 유익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한 숨바꼭질 이기를 결심해 본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예수 그리스도, 말씀, 빛)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일처럼 자기 만족과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구원에 관한 일이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이기에 구원을 베푸시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 혹은 믿도록 증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들러 내실 때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4장에서 수가성 여인에게(4:26절), 이후 본문을 포함하여 여러차례 사용하셨다(6:35, 41, 48, 8:12). 출 3:14에서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직접 밝혀주신 표현이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요한이 굳이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꾹꾹 눌러 기록한 분명한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 고백을 “믿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하나님의 일”임에 틀림 없다.


*주님,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습니다.
*주님, 하나님이시기에 파도 속을 걸어 오셔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신 줄 믿습니다. 나의 삶의 바다에서도 두려움의 항해가 아닌 기쁨의 항해가 되도록 늘 함께 하여 주십시오.
*주님, 주님과 함께 하는 항해… 풍랑을 만나도 평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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