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늘에서 내려온 떡 [요 6:41-59]
 – 2023년 01월 21일
– 2023년 01월 21일 –
유대인들은 ‘생명의 떡’이라고 밝히신 예수님을 배척했다(41-48절). 예수님께서는 이런 반응에 상관 없이 자신이 참된 양식과 음료인 “하늘에서 내려온 떡”임을 거듭 강조하신다. 이 떡을 먹어야 영원히 산다(49-58절).


1.유대인들의 반응(41-42, 52절)
유대인들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라고 밝히시는 주님의 말씀이 당황스러웠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처럼, “요셉의 아들이고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라며 “(서로) 수군 거렸다.” 또,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새번역_51절)’는 말씀에 “서로 다투었다!.”

“수군 거리다(공귀조)”는 말은 “불만하다, 불평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출신 지역, 그의 가정 환경, 부모에 대한 정보등을 모조리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에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아랑곳 하지 않고 “하늘로 부터 내린 생명의 떡이 자신의 살”이라고 말씀 하시자, 서로 “다투었다(마코마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인간)에게 먹으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은 이미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하자 보였던 반응과 비슷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비추어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 안에서만 받아들이겠다는 “오만과 독선”이다. 이는 자신들이 고수하는 관점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내 살을 먹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조차 못한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나의 이해를 전제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자신들의 지식 안에서 받아 들이려 하니 주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들렸다. 주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지식에 막혀 버렸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지식, 자기 이해의 안경으로 주님을 바라보지 않아야 함을 깨닫게 한다.


2.생명의 떡을 먹으면(49-59절)
그들의 조상들이 먹던 광야의 만나는 단지 육체의 양식이므로 결국 죽었다. 하지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영생을 얻는다. 본문은 생명의 양식을 먹는 그리스도인은 “다시 살리리라(44절),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50절), 주님(내) 안에 거하여 하나가 된다(56절)” 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즉,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각각 다른 표현들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낸 이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여 “쫓아내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 했었다(37, 38절). 그 굳은 결의를 이어가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영혼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을 다시 반복하여 약속하신다(44, 5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생명의 떡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50절). 왜냐하면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새번역_57절).” 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새번역_56절)” 는 말씀과 같이 “주(내) 안에 나도 그 사람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과 의 대화를 통해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 떡을 먹어야 만 구원 얻어 살 수 있음을 알린다. 스스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야 만” 구원 받는다.


나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 “수군 거린다(불평한다).” 또 자기 지식과 이해라는 무기로 치열하게 “다툰다.” 내가 배운 지식, 경험, 이해와 충돌시켜 자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배척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치열한 불평과 다툼은 진리를 더욱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과도 과정이 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고 사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의문들과 질문들을 직면하며 하나씩 진리를 추구하면 더욱 굳건한 믿음위에 설 수 있겠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수군거림과 불평은 아예 자신들의 율법해석과 이해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 되지 않음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애초부터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맞고 당신은 틀렸다”는 전제로 접근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답을 얻기 위한 수군거림과 다툼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나의 이해가 필요충분 조건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이해가 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을 받은 이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삶의 실제가 되는 신비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해하며 믿기”의 환상보다, “믿으며 살아가기”가 더 중요하다. 믿음은 이해가 전제 조건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인도와 보호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전제이다. “하나님이시니까!” 라는 신뢰가 먼저다. 이 신뢰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은혜이다. 이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반응하기 보다, 자기 이해, 전통, 논리, 인습에 더 반응하였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을 늘 추구해야 하겠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사라온 삶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모도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자라온 과정도 잘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며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어색하기만 했다. 자신들의 기억, “선입견”에 함몰되어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진리가 막혀버렸다.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자부하는 기억력이 선입견이 되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놓치고 있다. 때로 섣부른 앞선 지식이 진리와의 교통을 방해할 수 있다. 단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임에도 너무나 자신있는 선 지식이 되려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나에게도 말씀이 혹시 그렇지 않을까? 세상지식, 섣부른 말씀에 대한 앝은 지식에서 견고하게 구축된 선입견, 오랫동안 지켜온 성경과 상관 없는 전통과 관습의 틀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바라보고 있어서 어쩌면 더 믿고 바라는 것에 어색하지는 않을까?



*주님, 주님의 말씀을 나의 이해의 시선과 한계에 함몰되어 보고싶은 대로 보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대로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선무당이 사람 잡듯, 나의 얕은 선지식이 진리의 깊은 맛을 가로막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성령님 더욱 깨우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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