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 날부터 계속 주님과 동행하였다. [삼상 16:1-23]
 – 2022년 06월 02일
– 2022년 06월 02일 –

사울은 두 번에 걸쳐 불순종하여 그의 왕국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 이라는 심판의 말씀을 들었다(13:14; 15:28). 마치 엘리 가문을 버리고 “내 마음과 뜻대로 행하는 성실한 제사장(2:35)”으로 대체 하시겠다는 것처럼, 이제 사울 가문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대체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 선언에 따라 사무엘은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음 왕으로 세운다. 그러자 다윗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는 악령이 임한다….



1.사무엘은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1-5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버리신 사울로 인하여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 하신다.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족을 위하여 슬픔의 자리에게 일어나 행동하라는 것이다. 사울에게 단호하게 행동한 사무엘이 정작 라마로 돌아와서는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누구보다 더 슬퍼하고 있었다는 모습이 애닮다. 기름부음을 행하기 전에 밤새워 대화하며 보았던 순수한 청년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악한 이로 변했다는 사실이 매우 슬펐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사울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슬퍼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심팜을 받음으로 인해 일어날 민족과 나라의 혼란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그 혼란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될 민족이 염려 스러웠던 것이다.

*사무엘의 목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슬퍼하며 안타까워 하는 그 모습에서 기회를 연거푸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닮아있다. 그렇다. 목사는 이런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담대하고 올곧게 선언하기도 하지만, 이를 따르지 못하는 한 영혼이라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범죄한 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될 민족과 나라, 백성들에게 깊은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바라보는 마음도 있어야 겠다. 늘 과거에 마음이 묶여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여실 미래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슬픔을 훌훌 털고 미래를 맞이하러 나간다. 슬픔과 아쉬움이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슬픔에 묶여서는 안 된다. 맡겨주신 사명을 다시 챙겨야 한다. 신뢰하였던 이가 깊은 실망을 줄 때 영적인 침체가 함께 올 수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슬픔에 눌려 사명을 망각하면 안 된다.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을 다시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사울왕에게는 쿠데타와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무엘은 이 일을 사울이 알게 되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면서 기름부을 왕을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서 행하신다.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3절)”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주도적으로 이끄시겠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런데 이미 사울왕의 위세가 굳건하게 이스라엘 전역에 서 있었다. 성읍 장로들이 “떨며” 사무엘을 영접하며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묻는다(4절). 사울의 왕권이 철두철미하게 서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평강을 위하여, 제사하러 왔다(5절)”고 말하며 사울에게 베들레헴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했다.



2.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6-13절)
이새의 집에 도착한 사무엘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했다(5절 하). 그렇게 나아오는 엘리압을 바라보며 사무엘은 감동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라고 말씀 하신다. 마치 사울에게 하시는 말씀 같다. 엘리압의 외모와 삶은 사울과 닮았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여전히 사울과 같은 “왕의 외모”를 기대하며 기름부을 이를 기다리지만, 첫 번째 아들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 보지 않는다. 나는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본다”

*사무엘이 뜨끔했을 것이다. 사울에게 큰 실망을 했었도 여전히 사울과 같은 외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 함께 동역할 이를 찾으며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이상형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이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겉모습과 이력서로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에 발 맞춰 찾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심지가 견고한 이를 찾아야 한다.

아비나답, 삼마를 거쳐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갔다. 모두 아니었다. 이제는 양을 지키는 막내 다윗만 남았다. 하지만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사무엘에게 인사 시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무엘이 더 없느냐고 물을 때 막내 다윗이 양을 지키고 있노라고(11절) 답했다. 사무엘은 다윗이 올 때까지 식사 자리에 앉지 않겠다고 하며 기다린다. 그제서야 이새는 사람을 보내 다윗을 데려온다(11-12절 상).

그런데 사무엘 앞에 선 다윗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었다(새번역_12절 중).” 사울에 대한 외모 표현보다 더 구체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새번역_12절 하)” 하셨다. 사무엘이 형들이 둘러싼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새번역_13절)”

*사울도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본문은 매우 중요한 표현을 곁들인다. “그 날부터 계속”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과 함께 있었다. 아… 나에게도 이 은혜가 있음을 믿는다. 성령의 은혜와 감동이 날마다 계속 나와 함께 하여 주심을 믿는다.



3.사울을 악한 영이 괴롭혔다(14-23절)
다윗은 계속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였다. 반면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10:11; 11:16). 왕의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과 상관 없는 이가 되어 버렸다. 악한 영이 괴롭히는 사울은 점점 신하들의 눈에도 띈다(14-15절).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괴롭게 할 때” 수금을 타면 왕이 나을 것이라고(16절) 고한다. 이에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찾아 보라는 명령을 내린다.

소년(새번역_젊은 신하)중 한 사람이 다윗을 천거한다. “제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그런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사이며, 용감한 군인이며, 말도 잘하고, 외모도 좋은 사람인데다가,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새번역_18절)” 이에 사울은 다윗을 데려다가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았다. 다윗은 사울에게 악령이 틈 탈 때마다 수금을 들고 타서 악령이 떠나가게 하였다.

*신하들은 사울이 악한 영의 괴롭힘을 받는 것을 알았다. 또한 사람들은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색한 대조다. 하나님 나라 왕은 악령에 시달림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안다. 나의 삶도 성령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모든 이들이 알아볼까? 그것이 구원받은 은혜속에 있는 증거이리라.



나는?
-사무엘은 하나님의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을 세우는 것에 그토록 반대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더니,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울을 왕에서 폐하시다니…. 왕의 세움 받은 사울이었지만, 버림받은 사울이기도 한 그를 생각하며 함께 비탄해 했을 수도 있었겠다. ‘이렇게 버리실 것이 라면 왜 굳이 세우셨을까?’라고 원망하며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뿔에 기름을 채워서 베들레헴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한다.

-이해가 되지 않고 원망 스러워도 때로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때가 있다.” 믿음의 순종이 곧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나의 걸음 가운데 이런 순간 앞에 언제든지 직면 될 수 있다. 그 때, 사무엘의 믿음의 순종을 기억해 내며 소환해야 한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원망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순종해야 할 때라면 순종해야 한다.

-“…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1절)”

-“외모”와 “중심”… 어쩌면 이 시대의 화두일 수도 있다. 지금 세상은 극도의 외모지상주의 속에 함몰되어 있다. 예쁘고 잘 생기는 것은 당연한 시대다. 외모지상주의는 삶의 태도도 “눈이 보이는 외모와 키”로 판단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그런데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다윗은 “열외자”였다. 사무엘이 집례하는 매년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다윗이 꼭 봐야 겠다고 한 후에야 사람을 보내 데리고 올 정도였다. 아버지에게는 그저 양치는 소년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은 아버지 이새도 보지 못한 것을 보신다는 의미다. 그것이 무엇일까? 세상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외모와 이력보다 하나님께서만 보시는 특별한 기준이 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중심지 출신도 아닌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 출신에다, 형제들 중의 막내였고, 게다가 당시 문화에서 힘든 직군에 속한 목자였다.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없는 다윗이었다.

한편 아버지 이새가 보지 못한 다윗의 사람됨을 주변 소년들은 알고 있었다. 수금을 잘 탔고, 무용이 있었으며(원문은 용감한 전쟁의 사람이라는 뜻), 구변(지혜롭게 말함)도 있었다. 사울은 이런 다윗을 “크게 사랑”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을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굳이 본문에서 그 힌트를 찾으라면 13절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 시켰다(새번역)”라는 부분과 다윗을 사울에게 추천한 소년이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사이며, 용감한 군인이며, 말도 잘하고, 외모도 좋은 사람인데다가,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새번역_18절)” 라고 말한 부분이다. 즉,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되었어도 순종하지 못하고 온전히 동행하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다윗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후 “그 날부터 계속 주님과 함께 동행하였다”

*이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의 태도가 갖춰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울은 늘 함께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삶의 굳건한 태도”가 아닐까?

*이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그의 삶을 통해 주님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은 사람의 눈에도 확연하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보인다.


**주님, 저도 성령님과 늘 동행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잃지 않겠습니다.
**주님, 세상이 추구하는 외모와 능력보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중심을 따라 주님과 늘 동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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