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투구와 갑옷,칼 대신에 막대기, 물매와 돌맹이 다섯… [삼상 17:24-40]
 – 2022년 06월 04일
– 2022년 06월 04일 –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결심하는 때부터 골리앗과 실제로 싸우려고 나가는 때 까지의 과정이다. 다윗은 골리앗의 모욕하는 말을 듣고서 분노한다. 몹시 두려워 하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다윗이 골리앗의 모욕을 깨부수는 돌파구가 되려 한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골리앗과 싸워 이겼을 때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묻고 이 광경을 본 큰 형 엘리압에게 책망도 듣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다고 형들과 사울을 설득한다. 마침내 사울은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과 갑옷, 칼을 주지만 보통 사람보다 어깨 위 만큼이나 큰 사울의 복장이 맞을 리 없다. 다윗은 평소 자신이 가장 편안하고 익숙하게 사용했던 막대기와 물맷돌 5개를 들고 골리앗에게 나아간다.



1.수군대는 이스라엘, 분노하며 결전의 의지를 다지는 다윗(24-27절)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의 주요 도시를 독종으로 치신 것과(5:9) 미스바 전투에서 우뢰로 치셨던 것을(7:10) 망각하고 있었다. 또한 길갈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블레셋 진영을 자중지란으로 몰아 넣으신 것도(14:15)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잊지 않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다윗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리 없다며 그를 제거 했을 때 받게 될 승리의 포상을 구체적으로 묻는다. 이 정도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그냥 두시지 않을 것과 그를 처단했을 때 얻게 되는 포상을 들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를 처단하는 상상과 더불어 받게 될 보상도 구체적으로 들으며 믿음을 실제화 하고 있는 것이다(24-27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인 골리앗’을 보고 무서워 하며 모두 그 사람 앞에서 달아났다(새번역_24절). 그리고 서로 수군 거린다. “골리앗을 좀 봐라…또 올라와서 으리를 모욕한다. 사울왕은 누구든지 자 자를 죽이면 많은 상을 내리실 뿐 아니라 왕의 사위로 삼고, 그의 집안의 모든 세금을 면제 주겠다고 했다(새번역_25절). 골리앗이 나와 모욕하는 말로 항전을 북돋을 때 “몹시 두려워 도망하여 서로 이야기만 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의 모욕적인 말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군거림을 듣고서 되물었던 것이다. “저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준다구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새번역_26절)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란 그저 마음의 감정과 고백 뿐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목표)에 시선을 두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처단 했을 때의 포상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세속적’ 혹은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리앗을 제거하면 주어지는 포상을 알고 있었지만 되려 ‘몹시 두려워 떠는’ 모습과 대조가 된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를 확신하기에 약속된 포상을 구체적으로 묻고(26절) 또 확인한(30절) 것이다.

*하지만 포상보다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 대한 거룩한 분노로 “결전의 의지”를 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엘리압과 언쟁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물어보는 다윗의 모습에서(30절) 단지 포상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 보다, 골리앗의 모욕적인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해지는 백성들의 상태에 오히려 더욱 “결전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확연하다. 저자는 다윗이 엘리압과 언쟁하고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는(30절)” 모습을 다시 기록했다. 이것은 포상의 내용을 확인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대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각하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도록 깨우치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아… 이런 거룩한 사기를 북돋는 행동은 사울 왕이 했어야 했다. 주변 민족들을 압도하는(14:47-48) 사울 왕의 담대함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는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임한 하나님의 영이 ‘그 날 이후’ 사울에게서는 떠나가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틈 탔음을(16:14) 보았을 때, 다윗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분명하다.

*나의 목회가 “다윗처럼” 세상이라는 “거인 골리앗”과 같은 것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 무기력 해진 성도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의 당당함을 환기 시켜주고 신앙의 무기력에서 벗어나 생동하는 담대한 믿음을 되찾게 해주는 역할이었으면 좋겠다. 일상의 사소한 대화 속에서 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깨워지는 언어의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무기력한 그리스도인 아니라, 거룩한 의지로 담대하게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생동하는 신앙을 도전하도록 도왔으면 좋겠다.

*나의 귀에 들려오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듣고서도 두려워 하며 못 들은척,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는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와 믿음의 결기를 다지는 본이 되었으면 좋겠다.




2.거인 골리앗이 가져온 부정적인 효과, 다윗이 일깨우는 거룩한 도전(28-30절)
*다윗이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큰 형 엘리압이 들었다. 그는 화를 내며 꾸짖는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새번역_28절)

*엘리압의 반응이 아쉽다. 그는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은 것을 지켜 보았다. 또 그 이후 막내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인정하는 말을 통해서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40여일 동안 골리앗의 모욕하는 말을 듣고 동화(?) 되어 버린 것일까? 막내 동생의 결기를 “건방지고 고집 센”, “전쟁을 구경하려고 온” 철부지의 행동으로 일축한다.

*엘리압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여 담대하게 행하려는 다윗의 말보다 눈에 보기에 확연하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거인 골리앗”의 모욕하는 말에 더 신뢰(?)를 두고 있지 않는가!. 막내 동생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의 영이 충만 하여도 ‘거인 골리앗’에게는 안 된다는 굳건한 믿음(?)이 가져온 다윗을 향해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 웬지 익숙하다….

*”아무리 예수님이 오셔도 이 문제만큼은 고쳐지기 힘들겠다.” 라는 생각과 행동은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나 형식, 제도, 전통 등”을 두고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생각과 말일 것이다. 문제가 오래된 것일 수록 더욱 그렇다. 눈으로 보기에 선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행동들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을 고착시킬 수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전능 하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해 버린다. 지금 엘리압은 다윗에게 기름 부음이 있었고, 그 날 이후 계속 하나님의 영과 함께 다윗이 지낸 것을 망각하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거인 골리앗”이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영을 잊어 버리게 만들었다.

*엘리압 뿐일까?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과 똑같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여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모두가 몹시 떨며 두려워” 하고 있을 때, 거룩한 분노를 감추지 않고 이 사람 저사람들과 이야기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고 바라보도록 도전하며, 골리앗과 결전할 의지를 다졌다.



3.사울의 한계, 다윗의 창의적 접근(31-40절)
누군가 다윗의 거룩한 도전을 사울에게 알렸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부른다(31절). 다윗은 사울 앞에 서자 마자 “누구든지 저 자 때문에 사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습니다.(새번역_32절)” 라고 고한다. 그가 사람들과 이야기 한 것이 포상 내용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영적인 사기를 고취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말린다. “그만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 자와 싸운단 말이냐? 저 자는 평생 군대에서 뼈가 굵은 자이지만, 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새번역_33절)” 사울은 여전히 거인 골리앗의 외모와 전쟁 경험을 기준으로 극구 만류한다. 전쟁터에서 자란 골리앗과 어린 소년 목동의 전투력이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에게 악령이 틈 탈때 수금을 치며 회복 시킨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을 잊고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이라도 전쟁터에서는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의 안목과 판단은 세상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배운 지식과 삶의 경험으로 직면한 문제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 코너에 몰릴 수록 평정심이 함께 내몰리기 때문에 좁아진 시야와 조급해진 마음으로 치우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사울이 간과한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사울의 “경험론”에 근거한 만류에 다윗도 “굽히지 않고” “경험론”으로 응수한다. 그것은 전쟁 경험은 일천 하지만, 들판에서 양을 돌볼 때 직면 했던 ‘경험’이었다. 들판에서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자와 곰을 죽인 것 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고(34-36절) 자신감을 보인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새번역_37절)” 사울은 결기에 찬 다윗의 말을 듣고서야 출정을 허락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투구와 갑옷, 칼을 내어주며 구비하고 나가라고 한다. 일대일 결투 이기에 전쟁터에서의 일반적인 준비였고, 자신의 갑옷과 무기가 없는 다윗에게 사울의 배려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윗을 사랑하고(16:21) 아꼈기에 가능한 호의 였다.

*하지만 어린 소년 다윗이 입기에 사울의 갑옷과 투구는 너무도 컸다. 뿐만 아니라 처음 갑옷을 입었기에 너무도 불편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무장에는 제가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장을 한 채로는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고는 그것을 다 벗었다.(새번역_39절)”

*그런 다음에, 다윗은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가 메고 다니던 목동의 도구인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자기가 쓰던 무릿매를 손에 들고, 그 블레셋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갔다.(새번역_40절)

*다윗은 자신의 들판에서는 가장 익숙한,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너무나 창의적인 모습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간다. 그러나 상관없다. 다윗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다.

*사울은 자신의 경험과 기준으로 다윗의 출정을 만류하고, 그나마 마지못해 허락하고서도 자신의 투구와 갑옷, 칼을 내어 준다. 자신이 전쟁터를 누비며 당연하게 여긴 전쟁 도구이기에 다윗에게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에게 맞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방해가 되었다. 이쯤 되면 사울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탄식이 더 커졌을 것이다. 자칫 희생자가 생겨 이스라엘의 사기가 더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경험한 들판의 전쟁에 익숙한 것으로 준비했다. 투구와 갑옷은 필요치 않았다. 하나님께서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보호해 주셨듯 이 전장에서도 갑옷이 되어 주실 것이다. 칼도 필요 없다. 자신의 손에 익숙한 무릿매(물매)를 챙겨 들고 자신의 주머니에 시냇가에서 고른 매끈한 돌 다섯 개면 충분했다. 이것이 자신의 손에 딱 맞는 훌륭한 칼이 되어 줄 것이다.

*다윗은 전쟁터의 경험에서 오는 결투 준비가 아니라 자신이 들판에서 양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 마음가짐으로 결투 준비를 하였다. 블레셋과 골리앗을 양을 뺴앗아 가는 사자와 곰으로 여기고 들판에서 그들과 싸운 무기로 결투에 나선 것이다.



나는?
-거인 골리앗에 압도 당하여 두려움과 무기력에 빠진 사울과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교회를 향하여 오늘도 줄기차게 “모욕적인 말과 행동”으로 도발하는 세상의 소리에 거룩한 분노와 행동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단면을 느끼게 된다. 무력감에 젖어든 조국의 교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흐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아침이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연이어 이야기하며 무력하게 굳어진 이스라엘 군대에 심폐소생술을 하였다. 나도 믿음의 길에서 무기력에 빠진 성도들에게 영적 심폐소생술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목회를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세상의 경험으로 영적인 전투를 이길 수 없다. 영적인 전투는 영적인 경험으로 직면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 들려오는 모욕적이고 위압적인 말에 맞서려면 겉으로 필적할 만한 조건을 구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제로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골리앗의 모욕을 들으며 사울 왕과 이스라엘은 모두가 하나님보다 골리앗을 크게 보았다. 거인 골리앗은 하나님이 와도 쓰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게 보았다.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 뿐만 아니라 전능 하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거인 골리앗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일 뿐이다.


-다윗의 창의적인 적용을 꼭 붙잡아야지… 세상이 말하는 세상적인 준비가 어색하거든 과감하게 이제껏 함께 해 주셔서 내 손과 몸에 익숙한 것으로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면 된다. 세상은 세상에서 배운 지식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내야 할 곳이다.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은 세상의 방법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투구와 갑옷, 칼이 아니라 물매와 돌맹이었다.



**주님,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겠습니다.
**주님, 투구와 갑옷, 칼이 아니라 물매와 돌멩이, 막대기 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경험이 가장 큰 무기 임을 깨닫습니다. 일상에서 더욱 하나님 꼭 붙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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