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자나 곰이나 골리앗이나… [삼상 17:41-58]
 – 2022년 06월 05일
– 2022년 06월 05일 –

서로 대치한지 40여일만에 이스라엘에서 상대자가 나왔다. 골리앗은 ‘별일이다’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항오에 대항하기 위해 나오는 이스라엘 군인을 맞이하기 위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 점점 다가갔다(41절). 하지만 이내 자존심이 상했다. 잘생긴 홍안 소년이 막대기 하나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42절). 이내 긴장감이 풀리고 다윗을 우습게 여겼다.



1.칼과 단창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41-51절)
골리앗은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로 나아오다니,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는 것이냐?(새번역_43절)” 라고 묻고서는 블레셋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저주한다. “어서 내 앞으로 오너라. 내가 너의 살점을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마.”(새번역_44절 하). 일종의 심리전이다. 말로 기를 꺽기 위해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 보다 한술 더 떴다.

*다윗은 말에서 부터 골리앗을 압도한다. 골리앗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오리라 상상 못한 당찬 선언들이 쏟아질지 예상 못했다. “너는 창과 투창으로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오늘 너를 쳐서 …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주님의 구원은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렸고, 주님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새번역_45-47절).”

*전쟁 경험과 철제 무기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모욕하던 골리앗에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 마치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다(삼상 14:6)”고 외치며 블레셋 진영으로 내달렸던 요나단의 고백과 비슷하다. 아… 이런 담대하고 단호한 외침은 사울왕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애석하고 애석하다…. 하기야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난 왕과 늘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한 이의 차이가 아니겠나….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직면한 상황을 바라본다. 상황을 먼저 보고 이성적으로, 경험한 것을 끄집어 내어 대처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신앙의 길이다.

*그리고서 골리앗에게 재빠르게 달려가 물매에 물맷돌을 넣어 힘껏 던졌다. 돌이 골리앗의 두 눈썹 사이 미간에 박혀 버린다. 쓰러진 골리앗의 칼을 취하여 그를 밟고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었다(48-51절 상). 블레셋 군대는 골리앗이 어린 소년 다윗에게 목 베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51절 하).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 “가이를 지나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사아라임, 가드, 에그론에 이르는 길에는 블레셋 군인들의 시체들이 즐비하였다.



2.에글론 성문 회군(52-54절)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글론 성문까지 …. 이스라엘 자손은 블레셋 군대를 쫓다가 돌아와서, 블레셋 군대의 진을 약탈하였다(새번역_52, 53절).”
골리앗의 죽음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블레셋 군대를 뒤쫓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어쩐 일인지 ‘에글론 성문까지’ 다다랐다가 멈춘다.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인 에글론 성문 까지 다다랐지만,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러가지 추측을 가질 수 있지만, 53절은 “도망친 블레셋 진영”에 남아있는 전리품을 취하기 위해서 였다.

*아…. 이런 근성이라니…. 40일 동안의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것 만으로도 성문을 부수고 정복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에베스담밈(17:1)에 남겨진 블레셋 진영의 전리품들을 취하기 위해 성문 앞에서 회군한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다.

*믿음의 진군이 이루어질 때 뒤에 남겨둔 물질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늘 “여지와 염두”를 둔 것이 있으면 전진이 멈춰진다. 자신들을 늘 괴롭히던 블레셋에 대한 응징의 의지는 그들이 남겨 두고 간 전리품들보다 강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또 다시 시간이 지나면 블레셋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소탐대실”이며, “자업자득”이다. 아… 아쉬운 이스라엘아…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그의 갑주와 무기는 자기 장막에 두었다(54절). 이 구절은 굉장한 난해구절이다. 사울 왕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장악하고 있었고, 다윗이 왕이 되어서야 탈환하여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소년이었기에 ‘자기 장막’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골리앗의 머리와 그의 갑주를 다윗이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설명해 놓았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골리앗과의 싸움은 들판에서 사자나 곰과 사투를 벌인 것과 별반 다름 없는 싸움이었을 것이다.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이나, 모욕당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나, 다윗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포상을 받기 위해 달려가서 기다린다거나, 사울왕에게 나아가서 그 머리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골리앗의 머리와 갑주, 무기를 스스로 처리한다. 그가 포상을 바라고 한 싸움이 아닌 것이 확실해 졌다.

성경은 왜 다윗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과도하게 왜 그랬을까 상상할 필요 없다. 다만 전쟁이 일어나 이스라엘이 진을 친 ‘엘라 골짜기’는 베들레헴과 지척이었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에 든 채 사울왕을 만나고(57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그의 머리를 두었다는 것은 여부스 족속을 향한 경고의 의미일 수도 있겠다. 여호와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이다. 골리앗과 같은 인간적으로 보면 적수가 없는 상대라도 하나님께는 적수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갑주를 가지고 간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기념물,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케 하는 상징물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빚어가는데 좋은 학습교구재가 되게 할 것이다.



3.누구의 아들이냐?(55-58절)
이 단락에서는 “누구의 아들이냐?”라는 질문만 3번 등장한다. 이미 사울은 다윗을 수금을 타는 자로, 자신의 무기를 든 소년으로 세웠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포상 계획에 따라 그의 아비의 집의 세금을 감해 주기 위한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가는 뒷 모습을 보며 한 번 한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아브넬에게 인도되어 온 다윗에게 또 물었다…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들어 올릴 때 사무엘의 예언이 생각났을 수 있다. 그래서 다우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다윗은 사울의 질문에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58절).”

*다윗은 골리앗에게 나갈 때나, 그를 처치하고 돌아왔을 때나 변함없이 사울을 왕으로 섬겼다. 하지만 사울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오는 소년 다윗이 더 이상 예전의 다윗이 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서서히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에 이름을 드러내고 계신다. 사울왕의 마음에 웬지 모를 긴장감과 경계감이 읽어지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누구의 아들이냐?”



나는?
-통쾌한 승리다. 시원하다! 모욕 당하다 일거에 역전 하였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40일 동안 골리앗의 모욕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을까? 다윗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실제였만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인 이름일 뿐이었다. 다윗은 그 하나님과 늘 함께 동행하였다. 늘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양들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하나님은 종교적인 이름일 수 없었다. 그는 들판에서 매일 하나님의 실제 속에 살았다. 그러므로 골리앗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참을 수 없었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칼과 단창의 골리앗에게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상대가 사자와 곰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사자나 곰이나 골리앗이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길 줄 알았다. 아… 얼마나 기막힌 믿음인가!

-반면 소년 다윗의 신앙의 기개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완전한 승리의 기회를 또 스스로 날려버린 사울과 이스라엘이 두고 두고 아쉽다. 블레셋의 5대 성읍 중의 하나인 에글론 성문까지 쫓아갔던 이스라엘이 그 기세를 몰아 충분히 점령했을 텐데도 그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 버렸다…. 블레셋에게 당했던 고통과 모욕을 시원하게 갚아 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다. 그만큼 절박한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말머리를 돌려 간 곳은 후퇴하고 흩어진 블레셋 진영이었다. 그곳에 남아있던 노략물을 거두는 것으로 극적인 승리를 만족해 했다…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도 못했고, 열어주신 설욕의 기회도 완전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임하며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구하지도 않았지만, 다윗을 통해 반전의 기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회군을 해 버렸다. 단지 노략물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통탄할 일이다.

*믿음의 걸음에서 이스라엘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이만하면 되지….” 이런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충분히 열어 주셨음에도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판단하여 끝까지 순종하여 가는 것 보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충분했다면 거기서 멈춘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다. 이런 반복됨이 하나님의 이름을 종교적인 이름으로 전락 시킨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며 직면하는 믿음의 경험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실제하도록 가다듬지만, 어쩌다 한 번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반전의 기회가 주어 졌을 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 자신의 경험이나 주관이 우선인 이는 이 기회를 완전하게 선용하지 못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제한해 버린다.


**주님, 하나님의 영과 늘 함께 하여 인생이라는 전장에서 실제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누리겠습니다.
**주님, 사자나 곰이나 골리앗이나 하나님과 늘 함께 하기에 담대히 직면할 수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저도 늘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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