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흠” [레 21:16-22:9]
 – 2022년 08월 08일
– 2022년 08월 08일 –
본문은 제사장의 자격에 관한 것이다. 몸에 흠, 곧 상처가 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떡을 드리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자칫 육신에 장애가 있는 이는 제사장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은 육체적인 흠보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은 영적인 흠이 아닐까?


본문에서는 “흠(뭄)”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반복되는데 “얼룩, 결함”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육신에 장애가 있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은 그만큼 성결함과 완전함이 요청 된다는 뜻이다. “…. 그러나 그 사람도 하나님께 바친 음식 곧 가장 거룩한 제물과 거룩한 일반제물을 먹을 수는 있다. 다만 몸에 흠이 있으므로, 그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와, 내가 거룩하게 한 물건들을 더럽히는 일만은 삼가야 한다. 그것들을 거룩하게 한 이가 바로 나 주이기 때문이다.”(새번역_22-23절)

즉 육체적인 흠이 있다고 해서 제사장에게 주어진 음식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이로서 혹 육체의 장애가 있는 제사장 가문의 가족 구성원들이 생존권을 보호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정한 제사장이 성물을 먹는 것은 금하셨다(22:8-9).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이 제사장에게 음식으로 주어졌을지라도 여전히 구별된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백성들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 조금의 부정함도 섞이지 않도록 힘셨는데 정작 제사장이 부정하여 그 제물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부정한 제사장이 거룩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정결례를 행한 후에야 가능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성물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릴 수 있는 십일조와 첫 열매등을 가리킨다. 또, 성소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먹을 수 있는 화목제물도 포함한다 이는 제사장의 몫으로 취한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한 것들”이었기에 제사장은 먹는 부분에서도 거룩함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것에 대하여 이토록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알려 주시는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동안 거하였던 애굽의 제사장들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제사장 제도를 두시겠다고 했을 때 자연스레 애굽의 제사장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인간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철저히 섬기기를 바라신 것이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경배하도록 돕는 철저히 종교적인 직무를 감당하는 것을 알기 원하신 것이다. 제사장들이 정치적인 힘을 발휘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땅을 소유하거나 다른 이의 돈을 빼앗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런 상세한 제사장에 대한 지침은 백성들에게 애굽과 다른 제사장의 모습이었고 제사장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제사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에브리데이스터디바이블_p.215)


하지만 이러한. 제사장 규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이는 누구든지 인간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새번역_히 7:25)” 이 은혜로 인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고(고전 3:16), 그리하여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진 것이다.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의 장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영적인 흠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인 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백성의 삶을 살아내는데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고 스스로 세상의 유혹의 덫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영적 나태함이다.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이 아니라 스스로 유혹의 덫에 걸려 들려는 죄악된 마음이기도 하다. 베드로 사도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권면했다.



나는?
-“흠”은 “부정함” 자체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과 성결의 삶을 교육하면서 제사의 모든 과정을 집례하는 제사장에게 온전함 중의 온전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즉, 흠(장애)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제사를 인도해야 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오늘날은 지도자의 육체적 장애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심각한 영적, 정신적 장애가 더 민감한 시대이다. 육체적인 흠이 있을지라도 온전한 영적, 인격적 자질에 대한 달란트가 있어야 한다.

-흠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약점없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온전한 인간은 아무도 없다. 사전적 의미로 “완전하다”는 필요한 것이 전부 갖춰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을 의미한다. “온전하다”는 잘못된 것 없이 바르거나 옳음을 의미한다.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 이셨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통해 온전과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역의 강도는 매우 고단하였다. 육체적으로도 고단했겠지만, 정신적으로 마찬가지였다. 이런 측면에서 불편한 몸으로 감당하기가 여간 고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본문은 제사장 중에 흠이 있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은혜에서 배제한 것도 아니었으니(21:22) 흠 없는 이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규정은 오늘날로 말하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배려이다. 온전하게 드려야 할 제사를 제대로 감당해야 하는 거룩함을 지켜야 하는 데서 내린 명령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의 은혜로 인해 오늘날은 이러한 동물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자연스레 제사장의 직무가 필요 없으니 본문의 제사장의 육체의 상태에 대한 규정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 하지만 육체의 흠결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과 영성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인격,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그 안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영성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육체의 장애가 있어 능력의 한계가 분명하여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에서 어떤 성도도 배제 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다.

-교회 공동체는 오히려 사회적 약자와 육체의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더욱 더 가까이 가야 한다. 이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온전하거나 완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좋은 접촉점이 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눅 14장)에서 나가서 모든 이들을 초청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이루신 새로운 시대는 외적인 흠결이 하나님 앞에 서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욕심, 자기 계획에 함몰되어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인 흠결이 걸림돌이 된다.



*주님, 외적인 흠결에 치중하다 인격과 영성이 바닥날까 고민됩니다. 내적인 흠결을 늘 돌아보며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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