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꿀 수 없는 상황, 그럴수록 [삼상 22:1-23]
 – 2022년 06월 12일
– 2022년 06월 12일 –

본문은 다윗의 도피생활과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분량으로는 21장과 이어지는 사울의 놉 제사장들 학살에 더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 내용은 결국 몰락하는 사울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실 왕으로 준비되어지는 다윗을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다윗은 가드에서 미친척 하여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자 곧바로 가드를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쳤다(1절). 그리고 모압 미스베로 잠시 옮겨(3절) 부모님을 피신 시킨 다음, 갓 선지자의 조언에 따라 다시 유다 땅 헤렛 수풀에 이른다(5절). 한편 사울은 도엑으로부터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다윗이 왔었고 그가 다윗에게 빵과 골리앗의 칼을 준 것을 듣고 도엑에게 명령하여 놉 제사장들 85명과 놋 성읍의 남녀, 아이들, 젖 먹는 자들,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쳐 죽인다(18-19절). 이 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아달이 가까스로 도망쳐서 다윗에게 합류한다(21절).


1.아둘람 굴, 헤렛 수풀(1-5절)
아둘람은 베들레헴 남서쪽 약 20km지점의 평지 성읍이다. 매우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불렸다(미 1:15). 다윗은 가드에서 빠져 나와 근처의 아둘람 동굴에 몸을 숨긴다.

*다윗의 도피생활의 시작은 놉, 골리앗의 칼, 가드, 아둘람, 모압과 같은 키워드로 살필 수 있다. 공통점은 본격적인 도피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자기 결정, 자기 계획이었다는 데 있다. 요나단과 헤어지고 놉을 거쳐 가드로 향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골리앗의 칼은 다윗의 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안전책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간 가드에서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의심하며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미친 척 하며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둘람 굴에 숨어 들었을 때, 이 소문을 들은 사울의 통치 하에서 가난해지고, 소외된 자들이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 뜻하지 않게 추종 세력이 생긴 것이다. 무리가 400명까지 불어나자 더 이상 은신할 수 없어 증조할머니(룻)의 고향 모압으로 무리와 가족을 이끌고 옮긴다. 모압은 혈연 관계가 있어서 잘 받아 주었지만, 이 때 비로소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 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서야 할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갓 선지자의 조언에 따라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둘람 동굴 근처의 헤렛 수풀로 들어간다.

*다윗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했다. 안전할지 모르지만 내가 있을 곳이 아니면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보내어 직접 다윗의 걸음에 개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유대 광야에서 훈련 시키시는 것이었다. 사울에게 계속 쫓겨 다니겠지만,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실 작정이었다. 실제로 하나님만 의지하면 극한 상황에서도 살 길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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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칼, 가드, 모압은 본격적인 훈련 전에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각인 시키는 과정이었다. 광야 훈련은 내가 계획하여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과정이어야 했다. 다윗이 자기 주관으로 결정한 놉, 골이앗의 칼, 가드, 모압은 하나님의 계획에 없으셨다.

*우리도 이 부분을 잘 분별해야 한다. 내가 세운 계획과 걸음… 누구나 인생 계획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계획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여 나의 원대로 걷는 걸음은 하나님의 첨삭 지도가 따른다. 솔로몬은 이 진리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고 고백했다.




2.사울의 끝없는 추락(6-23절)
사울의 통치 민낯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사울의 폭력성은 점점 짙어진다. 사울의 손에는 늘 단창이 들려 있었다(18:10, 19:9, 20:33, 22:7). 폭력성과 강박관념이 어느덧 그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또 “베냐민 사람들”을 꼭 집어 한탄 한 것도(7절) 주목된다. 왜냐하면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사울 편을 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의심 많고 폭력적인 사울을 같은 베냐민 지파도 꺼리게 된 것이다. 이제 모든 백성이 사울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울은 ‘베냐민 사람들아(7절), …나에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8절)’ 역정을 낸다. 사울의 가신들이 주로 베냐민 사람이었는데, 그들마저 사울의 편을 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 많고 폭력적인 사울을 베냐민 지파도 꺼리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사울에게 점점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의 성품, 마음을 져버린 사울의 폭력성에 백성들의 민의도 돌아서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언어나 행동에서 폭력성을 절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모하는 이는 하나님의 성품도 사모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사울의 역정에 에돔 사람 도엑이 놉에서 다윗을 보았고 아히멜렉이 빵과 골리앗의 칼을 건네 주었다고 고발한다(9-10절). 사울은 지체하지 않고 군사들을 보내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남김없이 기브아로 불러 올린다. 그리고는 다윗은 충성스러운 사울의 신하가 아니냐며 항변하는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몰살한다. 더 나아가 놉 땅의 모든 주민들도 학살한다. 사울의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이 정도로 진심임을 온 이스라엘에 알리게 되었다.

*도엑(돌보는 자, 염려하는 자)은 에돔 사람이었다. 사울은 거점 마다 자신을 위한 눈과 귀를 심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엑의 보고에는 거짓말이 적절하게 섞여 있다. 다윗이 아히멜렉과 만났고, 빵과 칼을 내어 주었다는 것 까지는 맞는 보고였지만,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여호와께 물었다는 거짓을 고한다. 하지만 21장에서는 다윗이 아히멜렉을 만났으면서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메세지이다. 도엑이 이렇게 보고한 것은 아헤멜렉을 심각한 위험으로 몰아 넣는 것이었다. 도엑이 다윗과 아히멜렉의 대화를 들은대로 보고한다면, 아히멜렉은 사울의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다윗을 음식과 무기로 도운 것 뿐이었다. 하지만 다윗을 위해 예언을 했다는 것은 “제사장의 예언은 왕을 위한 것”이기에 심각한 반역죄에 해당할 수 있다. 도엑은 다윗과 그 세력을 무조건 증오하고 있기에 사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히멜렉을 다윗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 도엑의 보고를 통해 아히멜렉은 아히둡의 아들임을 밝히는데, 아히둡은 이가봇의 형제이므로 엘리가문의 후손인 것을 알 수 있다. 도엑의 고발은 엘리의 후손 제사장들의 몰살을 가져왔는데, 하나님의 예언 성취에 관심 없는 에돔 사람 도엑이었지만 아히멜렉을 모함해서라도 사울에게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그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는 시발점이 되었다.

*사울의 몰락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아히멜렉과 제사장들 85명과 그의 가족과 함께 사는 주민을 학살한 것은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의지의 강력한 표명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울의 리더십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막힌 것은 사울의 폭력과 억압이 도구되어 엘리 제사장에게 선언된 저주가 실현되었고, 동시에 완전히 멸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성취 되었다.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가운데서 끊기지 않는 긍휼의 구원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아비아달은 겨우 도망쳐서 다윗에게 합류하여 이 모든 일을 알렸다.



3.리더십의 차이
다윗과 사울의 리더십이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리더십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하다. 좋은 지도자는 평화의 시대를 가져오지만, 악한 지도자는 혼란을 가중 시킨다. 좋은 지도자는 백성을 섬기지만, 악한 지도자는 백성 위에 군림한다.

다윗의 리더십은 사울에 비하여 확연히 다르다. 가드에서 겨우 탈출한 다윗이 유대광야 아둘람의 어느 굴 속에 숨어 들었다. 이 소문은 머지 않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금새 400명이 되었다.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1 다윗은 거기에서 떠나, 아둘람 굴 속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형들과 온 집안이 그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다. 2 그들뿐 만이 아니라,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새번역_1-2절).” 한결같이 압제 당하고 빚에 시달리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다윗은 그들의 원통함을 들어줄 수 있는 지도자였다.

반면 사울의 리더십은 최악이다. 그는 자기 지파 사람들을 측근에 두었다. 왕위를 지키는데 이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었다. 사울에게 탕평은 없었다. 자기 권력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백성들의 민심은 그에게서 돌아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정치 보복을 멈추지 않는다. 다윗에게 먹을 것과 무기를 제공한 제사장 아히멜렉을 불러다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책망하고, 분에 못 이겨 군사들에게 아히멜렉과 그 일행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감히 제사장을 죽일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도엑이 나서서 학살한다. 도엑은 제사장 85명과 여자와 젖먹이 등 그 가족들을 한 날에 죽였다. 사울에게서 악행이 그치지 않고 나온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이 만행을 다윗에게 보고하였을 때, 다윗은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 스스로 탓하고 괴로워 했다(11절).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다윗은 자기 때문에 죽은 제사장들 때문에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그저 헤렛에 숨어들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슬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5절을 살펴보자!

“그 때에 갓이라는 예언자가 다윗에게, 그 산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어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그 곳을 떠나서, 헤렛 숲으로 들어갔다.(새번역_5절)”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 그 세상을 피해 모압 땅으로 피신했지만, 선지자 갓을 통해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신다. 상황이 변하지 않아 힘겹고 힘들 때,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다시 가라!”라고 말씀 하신다면, 마땅히 가야 한다. 상황이 변치 않아 답답할 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말씀이 주는 감동에 믿음을 걸어라!”


*주님, 답답한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놉, 가드, 아둘람, 모압으로 마음따라, 상황따라 움직인 것을 되돌아봅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 따라” 움직이겠습니다. 변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말씀의 피난처를 신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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