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전히 세밀하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 [삼상 23:15-29]
 – 2022년 06월 14일
– 2022년 06월 14일 –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하여 사울에게 넘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윗은 십 광야의 수풀(호레스_지명)로 숨었다. 이 때 요나단이 도망자 생활 중에 있는 다윗을 찾아가 위로한다. 한편 다윗이 숨어 있던 십 광야의 몇몇 사람들은 다윗의 위치를 자세하게 사울에게 밀고한다. 그리고 다윗은 붙잡히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군대를 블레셋의 침공 소식 때문에 돌리게 하셔서 다윗을 보호하신다.

다윗은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 사울은 많은 군사를 동원해 매일 같이 샅샅이 수색했다. 하지만 다윗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일까? 다윗의 능력이 출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도우셨기 때문이다. 본문도 여전히 세밀하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볼 수 있다.



1.요나단의 위로와 순응(16-18절)
십 광야 호레스(수풀)에 숨어 있던 다윗을 요나단이 찾아간다.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준 그일라 주민의 배신으로 급하게 도망쳐서 겨우 십 광야 호레스에 숨어들기까지 지친 도망자 생활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이다.

*고난의 고난이 이어져도 이처럼 믿음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듯한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더구나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부어 세운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죽여 자기 가문의 왕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아래에서 섬기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묻고 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쳐서 복종하는 것이다. 사울은 이것을 하지 않으려 했고, 요나단은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광야 학교와 같은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지체들이 생각난다. 힘들고 지쳐 있을 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보여야 할 모습이다. 판단과 비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주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 만나는 것을 사울의 정보망에 걸려드는 날에 감수해야 할 위험을 안고 만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만나러 십 광야 호레스까지 내려 온 것이다.

*다윗이 직면하고 있는 배신의 상처와 책임져야 할 무리들에 대한 부담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에 격려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윗에게 가장 큰 격려는 광야까지 찾아와 준 것 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인격적인 관계가 일어나면 좋겠다. 조건적인 관계보다 그저 하나님의 가족이기에 기꺼이 격려와 위로의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통해 지친 다윗의 마음을 격려하여 주심으로 도우신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위로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



2.계속되는 사람들의 배신(19-23절)
십 수풀 호레스의 몇몇 사람들이 자청하여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보고한다. 이로 인해 다윗은 큰 위기에 직면한다. 짐작해 보건대 사울이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놉 땅의 아히멜렉을 비롯한 85명의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한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삽시간에 퍼진 이 소식에 이스라엘 안에는 사울의 통치에 어느 누구도 바른 말로 직언하는 이들이 사라졌을 것이다. 사울의 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몇몇 십 광야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자청한 일이었다.

사울은 몇 번이고 다윗을 놓쳤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태도로 이들의 보고를 받는다. 그들에게 가식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 위선적인 지도자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면 이렇게 폭력적 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칼 끝을 다윗이나 백성들에게 겨누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축복하는 꼴이라니….

*정적에 무자비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의 이런 무자비한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을 깨닫는다. 0.01% 차이로 지도자가 되어 권력의 전부를 갖고 전횡하는 모습이 사울의 모습과 다를 바 무엇일까….

*권력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을 타락시킨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것을 사용하고 싶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남용하고 싶은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디오게네스), 만일 그 사람의 인성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줘보라(아브라함 링컨)….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임을 잊지 말아야지…

*지금 사울에게 비판과 견제가 없다. 그의 권력은 백성에게 무자비하고 블레셋(외부 대적)에게는 소심하다. 블레셋에게 약탈 당하는 그일라 주민들에게는 무관심 했지만,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밀고에 주저함 없이 군대를 일으켰다… 이런 지도자라니…

*이런 지도자의 통치 아래 정의과 공의가 상실된 백성들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예상되는 것 아닐까?….



3.어떤 사람… 셀라하마느곳(도피의 바위 or 분리의 바위_24-29절)
사울은 이번 출정에 매우 신중하고 치밀하게 접근했다.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다윗을 궁지에 몰아 넣고 빠져 나갈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은 채 압박하여 밀고 올라가는 형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을 돕는 “어떤 사람”이 사울의 출정을 알려 준다(25절). 다윗은 매번 사울보다 한 발 먼저 움직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울의 ‘유다 사람 몇 천명 중에 숨어 있을 지라도 기어코 찾아 내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면 결코 다윗이 숨을 곳이 없을 듯 한데, 이런 사울의 말과 행적을 고스란히 다윗에게 전해주는 무명의 “어떤 사람”이 있었다(25절). 십 광야의 몇몇 사람처럼 사울에게 밀고하며 다윗을 배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윗에게 사울의 행로를 은밀하게 알려 주는 “어떤 사람”도 있었다.

*다윗의 기름부음을 알고 있고, 그가 왕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 어떤 사람일 것이다. 사울의 통치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아닌 것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기에 처한 그일라 백성을 구한 다윗에게 협력하는 어떤 사람일 것이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무명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윗의 든든한 협력자들이 되었다.

*무명으로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와 격려일 것이다. 다윗에게 요나단과 함께 “어떤 사람”은 도망자의 생활 가운데 마음에 위로를 얻고 다시 의지를 다지게 하는 이들이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느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처럼 서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다윗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진퇴양난이다. 사울의 치밀한 전개 작전으로 마온 황무지의 어느 절벽과 비슷한 바위 위로 몰려 버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다. 사울은 어느 바위 위로 다윗의 무리를 몰아 넣고 완벽하게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였다는 급한 전령이 온다. 아무리 다윗을 잡기에 혈안에 되어 있는 사울이라도 이 소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울은 다윗을 뒤 쫓는 것을 멈추고 급히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돌아갔다. 이때 사울이 이것이 너무 아쉬웠는지 그곳 이름을 특별하게 명명하였다.

“셀라하마느곳” ‘셀라(바위)’, ‘마할로케트(분배, 구분, 반열)’의 합성어이다. 직역하면 분리의 바위이지만, 번역본에 따라 ‘도피의 바위’로도 번역했다. 영어 번역은 ‘the Rock of Escape(esv)’ ‘탈출의 바위’로도 번역했다.

*사울이 명명한 이 지명은 그가 얼마나 다윗을 잡기 직전에서 놓친 것을 아쉬워 하는지를 분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반대로 사울이 지은 이 지명은 다윗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증거가 된다.

*가장 절망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하고 두 다리가 풀려가는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다시 힘을 불어 넣어 주시는 바위였다. 끝까지 소망을 붙잡고 있었다면 그것이 헛된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망이었음을 확인하고 감격스러워 했을 바위였다. 붙여진 지명으로 볼 때 사울의 군대가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 올라갈 때 피할 길이 한 군데 없었다면 절벽에 가까운 바위였을 텐데, 그곳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생명의 바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기막힌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시 오지 못할 기회를 놓친 것이었고, 다윗에게는 “역시 의지하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놀라운신 생명의 역사였다.

*사울에게는 다윗의 도피를 끝장 낼 수 있는 곳 이었지만,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할 블레셋의 침공 소식에도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영적인 눈이 가리워 지면 이렇게 분별력이 저하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단(16-18절), 어떤 사람(25절), 블레셋의 침공(27절)으로 다윗에게 위로와 격려, 정보와 살 길을 주셨다. 순간 순간 급변하는 순간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생이라는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에게 다윗에게 행하신 것처럼 인도와 보호를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에게도 요나단과 같은 동역자, 어떤 사람과 같은 도와주는 이들, 긴박한 순간 예상치 못할 놀라운 섭리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 확신한다.

-나의 “셀라하마느곳”은 어디일까? 특정한 장소일까? 아니다. 말씀묵상이다. 말씀이다. 삶의 위기의 순간, 절벽에 선 것처럼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나를 이끌어 내어 주신 것은 “기록된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도우심, 인도하심이다.

-말씀의 바위 위에서 세상을 향해 다시 굳은 믿음의 의지 돋우어서 용기있게 세상과 맞서리라… 세상을 품으리라…



*주님, 도피 생활이 여전히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배신합니다.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그러나 그 길을 온전히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나의 길도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이렇게 인도해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나의 셀라하마느곳…. 그것은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도전이 와도 말씀의 바위 위에 있을 때 제 영혼이 안전함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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