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제대로 살고 싶다! [레 26:27-39]
 – 2022년 08월 19일
– 2022년 08월 19일 –
끝까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거절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경험해 보지 못한 비참함에 떨어지고 끝내 이방 땅으로 쫓겨날 것이다. 이는 그때서야 가나안 땅이 안식을 누리게 되는 꼴이 될 것이고 이방 나라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삶은 곤고할 것이다.


섬뜩하고 무섭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백성에 대한 응징은 집요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 “이렇게까지 하여도,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나를 거역하면, 나는 더욱 노하여 너희를 거역할 것이며,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보다 일곱 배나 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너희 아들의 살과 딸의 살이라도 먹을 것이다.(새번역_27-29절)” 원수들이 놀랄 정도로 황폐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거절하실 것이다(31-32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여러 민족들 사이로 흩어버리신다. 이런 사이에 그들의 터전은 황무지가 되고 만다(33절).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반전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이 원수의 땅에 끌려가 사는 “그 때에야 비로소” 땅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34절).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 땅도 쉬지 못하였는데, 징계를 받아 심판 속에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땅이 쉴 것이고 “제 몫의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살 동안에는 안식년이 되어도 땅이 쉬지 못했지만, 이방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들이 살던 땅이 폐허로 버려져 있을 동안에는 땅이 쉬게 될 것이다(35절).

아! 기막힐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쫓겨나야 땅이 안식”하다니…. 이스라엘 정체성의 근간은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이다. 이것들을 잘 지켜면 자유를 누리고 평안안에 거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면 가난과 억압과 착취가 일상이 된다.


36절은 전쟁에서 겨우 살아난 백성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여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게 된다고 하신다. 마음이 무너져 내려 소망이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심판의 가장 큰 결과이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했기 때문이다.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경고를 무시하며 마음대로 살아간 결과이다. 또,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되려 “약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더욱 담대하게 반전의 용기와 담대함을 갖을 법도 하겠지만, “일곱 배”씩 가중되는 심판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공포스러운 재앙(놀라운 재앙_16절)”이 시작되어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던 백성들은 고난과 전쟁에서 살아남아도 자기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 즉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도망치고,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함께 하고, 의지할 대상이 있으면 더시 힘을 낼 가능성이 있다. 보호자가 있으면 당연히 그에게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보호자되신 하나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스스로 절망하여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이리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이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 저주를 받더라도 저주가 결론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하나님만 되지 않으신다. 회복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극한의 심판 경고, 그것도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땅에서의 삶을 가르치시면서 굳이 축복의 말씀 보다 저주의 경고를 2배 이상 많이 하신 이유가 뭘까? 모세는 이 말씀을 대언하고 40여년이 지나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칠 때 신명기 28장에서 축복보다 저주의 말씀을 4배나 더 많이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인간은 그 죄성으로 인해 저주 받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축복의 말씀을 아무리 달달 외우고 있더라도 죄와 타협하고 죄의 낙을 누리는 것에 더 흥미로워 하고 신속하게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이 본성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저주의 말씀을 이토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가르치시는 것은 그만큼 경계하라고, 더욱 조심하라고 당부하시는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토록 당부하는 마음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 뿐인가?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에 더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이 신이 되고자 추구하며 교만방자히 행하는 역사였다. 수많은 인생들이 본문의 저주의 경고의 대상이 되었고, 그 저주의 시간들을 경험하였다.

그렇기에 저주를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거북스럽더라도 축복의 말씀을 달달 외우고 간절히 구하는 것만큼 이 말씀도 달달 외우고 제발 이와같은 저주의 길로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며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적어도 저주의 말씀이 떠올라 쉽게 죄악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럼에도 이 경고의 말씀을 망각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저주의 심판을 받았더라도 저주가 결론이 되지 않음을 기억해 내야 한다. 히스기야 왕이 예연자적 심정으로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씀을 기억해 내야 한다.

“당신들은 목이 곧은 조상과 같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라. 당신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겨라. 그래야만 주님께서 당신들에게서 진노를 거두실 것이다. 당신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면, 당신들의 친족과 아이들을 사로잡아 간 자들이 당신들의 동포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그들을 이 땅으로 돌려 보낼 것이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므로, 당신들이 그에게로 돌아오기만 하면, 당신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새번역_대하 30:8-9)”

이 말씀은 여전히 확실하게 유효하다. 언제든 절망 가운데서 굳게 붙잡아야 할 말씀이다. 특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들짐승들이 활개치며 우리의 자녀들과 가축들을 해치고 있는 이 시대에 더욱 유효하다. 전쟁의 여파로 시작된 황폐해져 가고 있는 경제 흐름 속에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파괴된 자연의 역습이 두려운 이 때에…. 무언가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로 무너진 예배를 먼저 회복하고, 세상 속 하나님보다 더 즐거워 했던 것들을 정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 이런 재앙의 시간을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곱 배”나 더해지는 하나님의 진노 뿐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언제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면 산다! 살아난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고싶다!


*주님, 살고 싶습니다. 이 지구가 살고 싶어 몸부림 치고, 사람들이 살고 싶어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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