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제 시작된 교회, 잘 자라야지! [살전 5:12-28]
 – 2022년 08월 28일
– 2022년 08월 28일 –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의 첫 번째 편지이다. 그는 2차 선교여행 중에 세운 이 교회에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본 후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교회를 설립하지만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다(행 16:6-40).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풀려난 후 몇 지역을 거쳐 도착한 데살로니가의 유대 회당에서 세 번의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교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과 교회를 가만두지 않고 핍박한다. 그들은 폭력배들을 모아 바울이 로마제국과 황제를 반대한다고 소동을 벌인다. 이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을 근처 베뢰아로 피신 시킨다. 이곳에서도 역시 복음이 전해지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그곳까지 쫓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결국 바울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급히 아덴까지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행 17:1-15).

이처럼 약 석 달 정도 머무는 동안 세 번의 가르침으로 시작된 데살로니가 교회는 처음부터 핍박 속에 있었다. 완강한 핍박으로 인해 바울이 떠나가고 교회만 남은 그들에게는 쉽지 않은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핍박의 분위기가 멈추지 않은 것이다. 바울을 괴롭힌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못살게 굴었다(살전 3:3). 또한 이제 막 시작한 교회였기에 가르침과 권면이 지속적으로 필요했다. 교회는 바른 가르침을 충분히 듣고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부활에 대한 오해(살전 4:13-18), 이방 종교의 가르침에 현혹되는 상황이 이어졌다(살전 4:3-8, 11-12; 살후 3:6-12). 그리고 바울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었다.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피신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를 떠난 셈이 되었다. 인사도 없이 황급히 떠난 바울에 대하여 남아있는 교인들은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쉽지 않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편지로나마 핍박 받는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원했고, 바른 가르침을 전달하려 했으며, 여러가지로 일어날 수 있는 오해의 불씨를 막으려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린 교회였다.
아기가 태어나 걸음마를 처음 배울때 여러 번 섰다 주저 앉기를 반복하면서 넘어지기도 한다. 이리 저리 기우뚱 거리면서 걸음을 뗀다. 이 모습을 보는 부모는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이내 넘어진다. 이때 부모가 몇 걸음 가다 넘어졌다고 해서 왜 똑바로 못 걷느냐고 야단치지 않는다. 부모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가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부모가 어린 아기의 첫 걸음마를 기뻐하듯이 교회로 하나씩 서 가는 모습이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미진한 부분이 왜 없을까마는 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유대인들과 황제를 숭배하는 이들의 핍박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교회를 향해 쓴 바울의 편지는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을 물씬 담아 교회가 바르게 걸어갈 수 있도록 권면한다. 실수를 교정해 주고 바른 길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이 배우지 못한 상태였기에 갖가지 위험요소가 넘쳐났다.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잠재적인 문제들인데, 신비종교의 영향을 받은 성적 유혹을 이기도록 가르쳐야 했고,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생업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했다(4:3-12). 주님의 재림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해야 했으며, 환난으로 인해 어려워진 분위기도 바꿔야 했다(5:12-22). 하지만 바울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5:23-28). 평강의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교회가 환난에 휩싸여 있지만, 희망의 노래는 살아있다. 사랑의 끈은 더욱 끈끈해진다.

본문은 환난이 가시지 않고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살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환난 속에서 신앙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1.공동체 안의 지도자를 귀히 여기라(12-13절)
교회에는 가르침과 지도자가 필수적이다. 지도자의 바른 가르침으로 교회는 온전하게 세워진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직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공적으로 세워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사하게 이런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알라(12절)’라는 말이나 ‘귀히 여기라(13절)’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은 이와같은 지도자 역할을 하는 이들을 교회가 그들을 무시하거나 반목하기 보다는 잘 인정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왜 그래야 할까?

12절에서 소개하는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단어들이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바울이 왜 이제 막 시작한 어린 교회 안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존경하라고 했는지 그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그것은 “수고하다, 다스리다, 권하다”이다.

“수고하다(코피온타스)”는 “땀을 흘려서 열심히 노력하여 지쳐 있는 상태”를 뜻한다. “다스리다(프로이스타 메누스)”라는 뜻은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의 안위를 묻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다. 그리고 “권하다(누테콘타스)”는 명령이 아니라 “마음에 두고 있다”라는 의미의 단어다. 상대방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고 이를 나중에라도 상대방이 알아차리게 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지도자는 한 영혼이 예수님 안에서 바로 세워지기까지 자신의 모든 힘과 열정을 다하여 땀을 흘리고 그 사람을 세우기 위해 권면하는 사람이 지도자이다.


2.서로 서로 (14-15절)
사람들을 대하는 여러가지 기준에 대하여 권면한다. 먼저 권계하라, 격려하라, 붙들어 줌, 도와줌, 오래참음, 선으로 대하라 등이다. 그런데 바울의 기질은 이렇지 않다.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2차 선교여행을 시작할 때 주목해야 할 일이 있었다. 1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와 마가와 함께 여행을 갔다 중간에 밤빌리아에서 지친 마가가 돌아간다. 2차 선교여행을 시작할 때 바나바는 다시 마가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바울에게 요청하지만 이를 거절한다.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크게 다투고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로 돌아가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시작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권계, 격려, 붙들어 줌, 도와줌, 오래참음, 선으로 대함과 같은 가르침과 조금 거리가 멀다. 자기 자신도 이런 가치들과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다. 우리도 머리로는 예수님처럼 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삶 속에서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런 갈등과 번민한다. 바울도 이랬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마가와 관계의 한계를 가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여정을 거치면서 변화되고 성숙되어져 갔다는 것이고, 완성된 인격이 아니어도 성숙함으로 가려는 의지를 늘 표현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의 연약함에도 말하고 권면하는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고 살아갔을 때 그 노년이 어땠는지 우리는 안다. 그는 끝까지 복음을 권계한다. 끝까지 격려하고, 끝까지 붙들고, 도와주며 오래참았다. 끝까지 선으로 악을 대하였다. 환난을 가져오는 악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선함으로 포용했다. 그러다 결국 주님 앞에서 순교하였다.

*지금은 어리고, 연약하지만 그의 노년은 성숙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늘 갈등이 있다. 왜 말씀대로 살지 못할까? 말씀이 왜 부담스러울까? 고민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말씀이 늘 들어오면 갈등 하게 하고 꿈틀거리게 한다. 곤란하고 어렵게 한다. 하지만 그 말씀으로 인해 점점 더 성숙해 진다. 말씀으로 채워가는 삶이 중요한 이유다. 말씀 앞에 찔림 없는 사람은 없다. 늘 좌절한다. 하지만 끝까지 말씀을 붙들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때가 되면 말씀의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숙은 인내가 맺는 열매이다.


3.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16-21절)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환난 속에서 살아 가야 할까? 7대 지침이다. 이 지침을 따라 잘 안되지만 결단하고 순종하여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 권면들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상, 쉬지말고, 범사에”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 일상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4시간, 1,440분, 86,400초 매 순간 이렇게 시도하는 삶을 그리스도인은 살아야 한다.

죄는 곰팡이과 비슷하다. 곰팡이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어김없이 피어난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해도 죄가 피어오르는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면 어김없이 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것을 닦는 것이다. 항상, 쉬지말고, 범사에 닦는 것이다.


4.그가 이루시리라(22-24절)
환난을 이기는 삶은 내가 나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절)”는 말씀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이루었다가 아니라 그가 이루셨다 라고 고백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가 이루어 가신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고백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5.우리를 위해 기도하라(25-28절)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생각해 보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린 교회다. 그들의 상태에 상관없이 기도의 부탁을 정중하게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이다.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온전히 하나되어 갈 수 있다.

오늘날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없어서가 아니다. 장소가 없어서도 아니다, 모임이 없어서도 아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부터가 하나됨의 시작이다.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굳이 기도를 부탁한 것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됨의 가치를 통해 환난 중에서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 견디어 보자는 간절함이었다. 공동체는 기도의 버팀목이 없으면 쓰러진다.


*더온누리교회는 어린 교회이다. 2020년 1월 5일 첫 예배 이후 이제 2년 8개월이 지나고 있다. 함께 분립하여 온 믿음의 식구들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식구들이 더 많아졌다. 목장의 목자, 전도회의 섬기는 이들…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공동체성이 일어날 리 없다.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고 오래 참고 선을 행하여야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온누리교회로 모이게 해 주셨으니, 마음을 여시기 바란다. 어색하지만 모임의 자리에 용기를 내어 참여 해보시기 바란다.

*우리 교회가 시간이 지날 수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실 일을 믿음으로 감사하며 항상, 범사에, 쉬지 않고 말씀을 따라 행하되, 함께 격려하며 행하는 교회로 성숙해져 가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교회다.


나는?
-12-15절은 공동체안에서, 16-21절은 개인이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신앙을 지켜 나갈 것 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함께, 그리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실천하며” 환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 22-24절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소망하며 인내할 것도 덧붙인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25-28절은 기도로 함께 이겨낼 것을 격려한다.

-환난의 폭풍이 거셀때는 주님의 평안의 품안에 거하며 폭풍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쩔수 없이 폭풍에 맞서야 할 때는 함께 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기대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힘을 모아 견뎌야 한다.

-이제 시작된 교회, 잘 자라나기를 기대하는 바울, 그보다 더 이 교회가 건강하게 자리매김 하기를 기대하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오늘 하루도 가르쳐 주신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주님, 환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겠습니다. 서로 알고 존중하겠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좋은 교회 만들어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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