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면초가의 사울… [삼상 28:3-25]
 – 2022년 06월 21일
– 2022년 06월 21일 –

급해지니 분간을 못한다. 아니 애초에 분별력이 없었다. 사무엘이 죽자 사울은 신접한 자(무당)과 박수를 모조리 쫓아냈다(3절). “바로 그 때에(새번역_4절)” 블레셋 군대가 수넴에 진을 친다. 사울도 길보아 산에 진을 치고 응전한다. 그런데 사울이 수넴에 진을 친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떨렸다(새번역_5절)”

너무도 급하고 심히 두려웠는지 이제껏 찾지 않은 하나님을 찾았다. 하지만 어떤 경로로도 응답해 주지 않으셨다. 그러자 사울은 해서는 안될 명령을 내린다. “망령을 불러 올리는 여자 무당을 한 사람 찾아 보아라. 내가 그 여인을 찾아가서 물어 보겠다.”(새번역_7절)

자신이 무당과 박수를 모조리 쫓아냈는데, 자신이 신접한 무당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라니… 한편으로 얼마나 그 마음이 두려움으로 내몰렸으면 그랬을까…더 황당한 것은 무당에게 “주님의 이름을 걸고(10절)” 그 여인을 처벌하지 않겠노라 약속하고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사울인 것을 알아챈 여인이 놀라자 다독이며 올라온 ‘사무엘’이라는 죽은 영은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자신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고 거기에 이 전쟁에서 사울과 가족이 내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이라며(19절) 이스라엘의 패배를 예언한다. 너무도 놀라 뒤로 벌렁 넘어진 사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려움 때문에 하루 종일 거의 먹지 못해 기력이 쇠진한 사울은 무당 여인의 음식 대접을 겨우 받고 그 밤에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다(20-25절).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로 생을 마감한다. 사울과 그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본문은 사울의 최후를 다루는 길보아 전투의 서막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전투의 서막은 신접한 여인에게 길을 묻는 영적으로 방황하는 사울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수넴 지방에 집결한 블레셋의 군대를 바라보며 두렵고 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했지만, 악한 영의 붙들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달린 삶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나님을 찾는 그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신다. 불순종으로 일관하다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부르짖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허무한가!

그렇지만 하나님의 무응답에 더욱 회개해야 함에도 급한 마음에 사무엘이 죽은 이후 자신이 직접 처리했던 하나님께서 금하신 무당(신접한 자_레 19:31; 신 18:11)를 찾는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참 당황스럽다. 평생 블레셋을 이겨보지 못한 그가 블레셋 군대가 대규모로 집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의탁 했어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처럼 가장한 땅에서 올라온 노인에게 토로한 그의 앞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 (새번역_15절)”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줄 알았다면,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달라고 회개하고 부르짖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금하신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오는 사술을 행한 것이다…



*살다보면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가 있다. 본문의 사울에게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사울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나? 거듭 거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불순종하는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셨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응답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쬐끔~~ 아주 쬐끔~~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다. 자녀를 내버려 두는 것 만큼 큰 질책은 없다. 아무리 훈계해도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고 자녀를 내버려 둔다. 더 이상 부모로서 자녀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보호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부모의 도움 안에 있다가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 만큼 큰 훈계는 없다. 하지만 내버려 두는 그 마음에는 “이제라도” 라는 간절한 바램이 있다. 하나님도 그러셨을 것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그런데 그 맹세가 기가 차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울의 마음은 이미 죄악으로 가득 찼다.

*신접한 여인이 있는 곳은 “엔돌”이라는 곳이다. 수넴 근처이다. 즉,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이 그 두려움의 근원인 블레셋 군대에 더 가까이 가는 위험을 무릎쓰고 담대하게(?) 엔돌로 향했다. 에구야… 그런 열심과 용기를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으면 어땠을까? 비록 응답하시지 않지만, 깊은 회개와 통렬한 돌이킴으로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사울은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것 보다, 죽은 사무엘의 영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왜곡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인에게 불려 올라온 사무엘의 겉옷을 입고 있는 노인은 사울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 저주에 놀란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진을 보고 놀라 두려움으로 식음을 전폐한 이후 하루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기력이 다하여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신접한 여인이 되려 사울을 걱정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고기와 빵을 새로 만들어 와서 먹인다. 신접한 여인이 챙겨주는 음식을 먹는 사울과 군사들의 모습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 없다.



*사울의 길보아에서의 마지막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당당함 마저 완전히 땅에 떨어진 비참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최후가 될 것이라는 전해 들은 사울이 어떻게 힘을 내어 전장에 서 있을 수 있겠나! 이미 꺾여 버린 그의 의지가 애처롭다.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의 삶에서 돌이켜 보고자 하는 의지 보다. 하나님께서 무응답 하시자, 우상을 찾았다. 사울의 내면이 이렇게 나약해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현상에 매달렸다. 하나님을 포기하고 외면한 인생에게 자기 삶을 포기하는 일은 더 쉬운 것이었다. 왕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승리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내려 놓은 것이 길보아에서의 죽음의 서막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때 사울이 찾았던, 믿고 의지하고 싶었던 신접하여 불려 나온 사무엘의 혼령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지 못했다.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사울의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울의 모습은 자신이 행한 죄악의 열매였다. 늘 반복적으로 불순종했던 것과 제사장을 몰살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 통로를 허물어 뜨린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살아 생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사무엘이 죽자, 갑자기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무당과 박수를 쫓아 내더니,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인식한 블레셋의 군대를 보며 자신이 쫓아낸 무당이 불러온 거짓의 영에 사로잡히는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측은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자신이 행한 죄악의 결과였다. 늘 불순종하고 죄악을 행하는 사울에게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당연했다. 마찬가지다. 반복적인 불순종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떠나시는 요인이다. 성령께서 떠나시면 밀씀을 들어도 들을 수 없고, 깨닫지 못하며, 아예 관심도 없어지게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다 하여도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한 관심도, 경청도, 순종도 없다면 이 방법들은 아무 소용 없게 된다. 정작 들어야 할 때, 듣고 싶을 때, 필요할 때 깨닫지 못하게 된다. 사울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늘 순종을 추구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삶이어야 하리라.



*누구나 앞 일이 궁금하다. 특히나 초조하고 두려운 일을 직면할 때 더욱 궁금해 지기 마련이다. 무당과 박수를 불러 앞 일을 내다보는 일은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금하신 일이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불안하니 미래가 궁금할 수 밖에… 지금 우리에게 일고 있는 무속의 바람이 심상치 않다. 공적인 영역에 사술이 들어가면 소망이 없다. 재미로 보는 사주 운세라며 가볍게 생각하지만, 이미 그 마음은 사주와 운세에 붙잡혀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현재를 미래처럼 사는 인생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현재를 살면서 미래도 함께 사는 비결이다. 그런데 연약한 인생들은 믿음의 통로 보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기를 원한다. 무속과 사술에 빠지게 되는 강력한 유혹이다.

*무속과 주술, 사주와 운세는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는 유혹”이기에 “좀 더 용한 무당을 찾아” 다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사는 방법은 “내가 듣고 싶은 것”을 찾아 사는 것이 아니라, “내게 들려 주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내게 들려 주시는 말씀의 통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통로이든 말씀을 들려 주신다. 그런데 사울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무리 많은 통로, 옵션을 가졌다 할지라도 “들은 말씀 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통로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떠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상이 무너질 듯한 두려움과 막막함에 철저히 내버려 질 것이다.



**주님, 사울의 길이 이토록 비참합니다. 나의 삶의 길에서 이 길만은 걷지 않겠습니다.
**주님, 무당과 박수를 쫓아냈지만, 결국 그들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사울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늘 함께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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