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눈 뜬 맹인 되어서는 안되지…. [요 9:24-41]
 – 2022년 02월 02일
– 2022년 02월 02일 –
또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신 주님을 바리새인들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날 때부터 어둠에 있다가 빛을 보게 된 감격을 누려야 했던 고침받은 맹인도 주님께서는 선지자라고 했다가 함께 매도의 대상이 된다. 사랑과 공감을 잃어버린 종교가 얼마나 냉혹해 질 수 있는지를 바리새인들을 통해 깨닫는다.

유대인들은 눈 뜬 사람을 다시 불러서 추궁하고 결국 그를 출교 시키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주님께서 그를 다시 만나셨고,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를 고백하게 된다. 그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선지자라고 확신했고 주님을 만나 직접 뵙고 대화하며 주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한다. 유대인들에게 출교 당함과 비난 받음을 감수하고서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게 되었기” 대문이다. 자신의 확실한 경험은 무수한 논리를 뛰어 넘는다. 그의 담대함이 도전 된다.



1.바리새인들의 억지
그들은 맹인이었던 그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서 안식일에 죄를 범한 죄인인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강요한다(24절).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그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신을 고쳐 주신 것 하나는 확실하다”며 꿋꿋하게 대답한다(25절). 그러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했는지 재차 묻는다(26절). 맹인이었던 그는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새번역_27절)”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다시 화를 내며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며 주님은 어디서 온 지 알지 못한다(28-29절)고 소리친다.

맹인이었던 그는 (율법을 너무도 잘아는 당신들이)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이상한 일이라며 적어도 자신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기에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이 확실하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일도 하지 못했을 것(30-33절)이라고 대답했다. 바리새인들은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났으면서(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 하는가?(34절)”하며 맹인이었던 그를 내쫓았다. 너무도 확실한 증거도 외면하며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 추하기만 하다.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이런 억지스러움 어찌해야 할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정신은 무시하고 안식일 규정은 철저했다. 정신이 사라진 형식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를 위해 존재할 뿐 이었다. 맹인이었던 그의 고백처럼 날 때부터 맹인이 고침을 받은 실로 놀라운 표적 앞에 주님에 대한 정해놓은 결론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결론을 정해 놓고 주님을 바라보니, 하나님 나라 임함의 놀라운 증거도 그저 안식일을 범한 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이런 억지스러움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도 이런 억지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있다. 사상, 철학, 이념, 정치 등에서 결론을 정해 놓고 무엇이든 해석하는 한편으로 치우친 분들이 꽤나 있다. 선의든 악의든 자신들의 결정을 지지하고 보완해 주도록 성경을 이용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느껴진다. 해석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본질을 벗어난 억지 주장이 교회를 멍들게 하고 사회에서 점점 고립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억지스러움…. 교회는 어찌해야 할까? 성도는 어찌해야 할까?



2.고침받은 맹인과 주님의 대화
주님은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 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만나셨다(35절). 그리고는 “네가 인자를 믿는냐?(35절)”고 물으셨다. 그는 그가 누구신가 내가 믿고자 한다(36절)고 고백한다.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그를 보았고,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새번역_37절).”고 말씀 하셨다. 이에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38절)”라고 고백하며 땅에 엎드렸다. 엎드린 그를 향해 주님은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새번역_39절).”고 말씀 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이 자신들을 향한 말씀인 줄 알고 화를 내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새번역_41절).”고 하셨다.

눈을 뜬 맹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명쾌하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 한다’ 지금 눈 뜨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착각하고 있다. 눈은 떴지만, 실제는 눈뜬 소경인 셈이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나았다는 것 자체가 확실하고 명확한 증거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야 주님의 능력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주님의 정체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주님을 견제 하려는 종교적인 욕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참 못났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욕망과 술수는 “자신이 직접 주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한”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그는 주님을 만나고 선지자가 아니라 “구원자”되신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날 때부터 어둠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나왔기에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을 치유한 증거를 보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바로 그다!”는 말씀 한 마디에 주님을 주님으로 맞아 들였다. 비록 보지 못했을 때 들은 음성이고 경험한 손길 이었지만, 보고 나서도 그 음성을 잊을 수 없었다. 단박에 알아 챌 수 있었다.



나는?
-주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하면 거침이 없다. 아무리 세상이 논리로 과학으로 학문으로 물질로 진리 되신 주님을 가리려 하여도 오히려 그들의 음성이 궤변으로 들릴 뿐이다.

-교회 공동체를 세상적인 이치와 논리, 학문으로 이끌려 하여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을 신비로운 치유를 경험한 이들의 믿음의 고백들로 이런 유혹들을 충분히 이긴다. 말씀으로 세상학문을 충분히 감당한다. 말씀으로 인해 치유함을 받은 이들은 세상 학문보다 말씀의 깨우침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인다. 눈 뜬 맹인과 같은 영적 기개를 잃지 말아야지…

-부끄러운 종교 지도자들은 되지 말아야지… 주님의 말씀 처럼 목자가 되어야지… 자신의 욕심을 지키려는 지도자는 공감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지기 마련이고 자기 주장만 궤변으로 늘어 놓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라떼 지도자(나 때는, 내 말은 말이야)”가 되지 말아야지… “말씀 지도자(말씀에는 말이야)”가 되어야지…

-세상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 동안 온통 검은 색만 보았던 그가 이제 막 아름다운 천연색깔들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의 감동과 감격, 기쁨과 환희에 함께 격하게 반응해 주지 못할 망정, 어떻게 된 일이냐는 둥, 너를 치유한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냐는 둥… 이게 할 말인가?…..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보지 못하다니, 그러니 육신의 눈은 멀쩡히 보이더라도 영적인 눈은 아예 소경인 게지….


*주님,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에 세상 논리(유혹)에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주님, 눈 뜬 맹인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밝히 보고 싶습니다. 제 눈을 더욱 밝게 열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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