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양의 문, 선한 목자 이신 예수님 [요 10:1-21]
 – 2022년 02월 03일
– 2022년 02월 03일 –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치유 받은 것 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바리새인들의 행태와 연결하여 주님은 “선한 목자”에 대하여 말씀을 이어 가신다. 구약 에스겔 34장에서 이스라엘 목자들이 양을 치지 않고 죄악을 일삼는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양을 돌보시겠다고(겔 34:15) 공언하시고 이 일을 목자 다윗을 보내 실행하겠다고(겔 34:23) 하신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양(백성)을 돌보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대상일 뿐이다.

목자와 양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 23편, 시 80:1, 사 40:11등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묘사된다. 모세도 역시 목자였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하나님께 간구한다. “한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지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이 기도의 결과로 세움 받은 이가 바로 여호수아(헬라어_예수)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어갔고, 예수님은 두 번째 출애굽을 통해 온 인류를 하나님 나라에 들이는 일을 참 목자 되셔서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목자 하면 생각하는 인물은 바로 다윗이다.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던 목동 다윗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목자가 되었다. 하지만, 밧세바 사건과 같은 사건을 보면 그조차도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겔 34장에서 신랄하게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비판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 되어 주셔서 양들을 구하고 거짓 목자는 심판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새로운 목자를 세우겠다는 약속이었다(겔 34:23-24). 이 약속을 따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의 1차 수신자들은 이러한 구약성경의 지식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목자 메시아”임을 말씀 하신 것이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거짓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목자 메시아이심을 밝히신다.



1.양의 문이신 예수님(1-10절)
목자는 양의 문으로 들어간다. 도둑은 다른 곳으로 은밀하게 들어간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 타인의 음성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망친다.

특히 주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7절)”이라고 하신다. 문을 통과하지 않고 드나드는 이들은 도둑이고 강도라 하신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마 21:13)’로 만들어 버린 자들이었다. 성전을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욕을 채우는 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럴싸한 문인데, 하나님께는 굳게 잠겨 있고 자신들을 위해서는 활짝 열려 있다. 사람들의 영혼을 도둑질하고 빼앗아 죽이는 ‘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교회가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문임을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 되어야 한다. 구원의 유일한 문 되신 예수님은 온간데 없고 세상과 담 쌓아 버린 “벽”, 종교 기득권을 높이 쌓아 올린 “벽”이 되어 버린다면… 아무리 “문”을 만들어 놓았어도 그 문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 시키는 문”이다.

*헌데 오늘날 교회가 이와 다르다 단언하지 못하겠다. 유일한 구원의 문 되신 예수님을 향해 열려 있기 보다 종교의 제도, 전통, 엇나간 신학으로 더 열려 있어 주님께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전통, 제도, 교리, 신학의 음성보다 “말씀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양의 문인척 양들을 유혹하는 그 소리들에 반응하지 말아야 하고 “도리어 도망해야(5절) 한다. 그래야 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보다 타인의 음성에 귀가 더 열려 있다면 기가 찰 노릇이다. 눈 뜬 맹인이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며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온 무리들과 같다. 그저 장로들의 전통(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말씀인 것으로 맹신하면 이렇게 된다. 말씀을 직접 읽고 생각하며 성령께서 깨우쳐 듣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람의 음성이 마치 주님의 음성인 양 반응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 무엇이겠나!

*한편으로, 주님께서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참 감사하다. 아무리 벽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더라도 문이 없으면 “불통”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벽이 높고 깊이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지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신 예수님이 있어서 감사하다. 세상과 하나님이 아무리 죄의 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해도 교회를 통해 구원의 문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들어올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이 땅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 더온누리교회가 존재 이유 답게 서 있겠지?

*’양’이라는 동물은 지독한 근시 동물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목자가 없으면 살아남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 성경이 성도들을 “양”으로 비유할 때가 많은 것은 양이 목자의 음성만 들어야만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힌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



2.목숨까지 바치는 선한 목자(11-18절)
양의 문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과 꼴을 얻을 수 있다. 삯꾼 목자는 위기상황에서 도망가지만,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 뿐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도 우리로 불러 들이신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마가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증언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선한 목자의 특징은 또 있다.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양을 버리고 도망친다(12절). 하지만 선한 목자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기에(14절)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끝까지 이리에 맞선다. 결코 이리에게 양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죄와 사망”라는 이리에게 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신 값을 치루실 정도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양을 포기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분명하다. “양을 알고 양이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자신을 알고 따르는 이들을 방치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 알고 있는 양”만의 선한 목자가 아니다. ”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새번역_16절)” 주님은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에게도 그 음성을 들려 주신다. 듣게 하신다. 결국 “한 무리 양 떼”가 되게 하신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찾고 계신다.

*이 일은 순전히 주님의 의지와 결정으로 하시는 일이다.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강요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자기 결정이다(17-18절). “스스로 버릴 권세”를 행하셨다. 그런데 스스로 버려야 스스로 다시 얻는다.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다.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17절)”이고 “스스로 버릴 권세도 다시 얻는 권세도 나에게 있다(18절)”.

*주님은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이시다.



3.주님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19-21절)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음을 선언하자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 일부는 주님이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며 맞선다. 주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분쟁이 일어난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목자는 “다윗”과 같은 목자다. 부국강병을 회복하여 다윗 때의 영화를 회복시킬 강력한 왕이다. 하지만 주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들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는 자발적인 순종으로 구원의 문이 되셨다. 풍성한 생명의 꼴을 먹이시는 목자 이시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으로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목자셨다. 그래서 의견이 분분하다. “귀신 들려 미친 것(20절)”이라고 하고, “귀신 들린 자가 어떻게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맹인을 치유할 수 있느냐(21절)” 하고 분쟁한다.

주님이 직접 말씀 하셨다. “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34)” 적당히 세상 논리, 전통, 종교체계, 교조주의에 순응하면 이것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하지만 주님은 적당히 세상논리와 종교논리에 타협하며 누리는 평안보다 “말씀만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한 말씀의 검”을 주러 오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보내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검을 휘두르라고 주셨다. 그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 되신 주님께로 나올 수 있게 하니까….

말씀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과 격렬한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씀을 지키기 위해 세상 가치과 치열한 투쟁이 없다면 과연 그 말씀 때문에 구원 얻은 이가 맞을까? 그러므로 말씀이 내 마음에서, 나의 생각에서, 나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세상 논리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현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말씀을 듣지 않거나, 말씀이 들려지지 않거나, 들어도, 들려 져도 반응하지 않고 그저 세상 논리에 편안히 안주하려는 것이다. 말씀이 생각과 마음과 삶을 격동 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기존에 알고 있던 당연한 것이 흔들려 져야 하나님 나라 진리가 자리 잡는다.



나는?
-문이 되어 주셔서 감사하다. 그저 죄의 벽에, 사망의 벽에 가로 막혀 소망 없는 인생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벽이라도 구원의 문 되신 주님을 만나서, 그 문으로 들어오게 하셔서 감사하는 아침이다.

-우리에 들지 않은 양이었던 나를 불러 주셔서 감사하다. 나도 여전히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잊지 말아야지… 그들에게 구원의 문, 생명의 풍성한 꼴을 주시는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게을리 말아야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감사하다. 무엇보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 양은 그 음성을 알아 듣는다.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 목자를 따른다(3-4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수 있도록 귀를 열어 주셔서 감사하다.

-그런데 건강한 양은 타인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음성에게서 도망친다(5절). 나는 주님의 말씀의 음성만을 따라 가는가? 타인(세상,종교지식,철학, 전통 등등)의 음성에서 도망하는가? 생각해 보니 도망치지 않는다. 도리어 호기심으로 더 들으려 하고 붙잡으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이 분명히 말씀 하신다.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도망친다고… 목자의 음성을 따르는 것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경험이 목자의 음성을 따르게 한다. 목자가 아닌 다른 음성을 따라 갈 때 당한 낭패와 실패가 그들의 음성에게서 도망하게 한다. 결국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과 실제의 문제이다. 난 주님의 음성만을 따라 가야지….

-말씀 때문에 세상 논리, 종교 지식, 제도, 전통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회피하지 않겠다. 오직 말씀으로 살아내기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그것이 사는 길이다.


*주님, 죄와 사망의 견고한 벽 때문에 절망했지만, 문이 되어 주셔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모으시는 주님처럼 그들에게 더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 한 무리가 되겠습니다.
*주님, 말씀 때문에 치열하게 싸우겠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가도록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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