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정의와 공의의 가치와 방식으로 [렘 22:1-9]
 – 2023년 08월 17일
– 2023년 08월 17일 –
시드기야 왕은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주전 597년에 등극해서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다스렸다. 그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신탁을 요청한다. 시드기야는 예언자를 찾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모습을 보이지만, 끝까지 순종하지는 않는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유다 왕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구하는 이야기는 모두 세 번(21:1-10; 37:17-21; 38:14-28) 기록되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레미야는 동일한 멸망의 신탁을 전한다. 유다와 예루살렘, 다윗 왕조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되돌릴 수 없다.
    
    
    
1.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1-10절)
주전 588년 1월에서 587년 7월 사이를 배경으로 한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2차 침공으로 포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드기야는 제사장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하나님의 신탁을 구한다(1절). 그는 출애굽의 하나님과 주전 701년 히스기야 통치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포위당하였다가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것을(cf. 왕하 19:35-36; 사 37:36-37) 염두하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여(2절)” 주실 것을 기대한 것 같다. 망상이다.
    
시드기야의 이런 행동에는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여호와께서 들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막연한 기대는 단호하게 거절된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파국적인 멸망에 관한 신탁을 주신 것이다(3~7절).
    
파국적인 멸망의 주체는 바벨론 군대가 아니다. “내가”라는 독립 인칭대명사가 반복되어 사용된다(4, 5, 6, 7, 8, 10, 14절). 또, 같은 의미의 단어를 세 번 연이어 사용하셔서(“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여호와께서 얼마나 크게 노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격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살아있는 것을 “칼로 치시고 전염병으로 죽이실 것(6~7절)”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하나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7절은 신탁을 부탁한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함락되기까지 전염병과 칼과 기근을 피해 살았을지라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성에 남은 자들은 모두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져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cf. 39:4-10; 52:1-16; 왕하 25:1-7, 18~21절).
    
    
시드기야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백성들에게도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8-10절).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멸망은 확정된 운명으로 돌이킬 수 없지만, 백성들에게는 아직 선택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8절).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에게 넘겨주려는 여호와의 의지에 맞서 성안에 머물기로 작정한 자들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 죽임을 당하겠지만, 하나님의 경고에 따라 성을 떠나 포위하고 있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병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힘겹게 전리품을 얻어내듯이, 목숨을 구할 수 있다(9절). 하지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 불태워버리기로 하셨음에도 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성과 함께 타오르는 불길에 멸망 당할 수밖에 없다(10절).
    
예레미야의 선포에 따르면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 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종이 되는 것이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는 것은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멸망으로 끝장나지 않고 바벨론 포로민들 가운데로 이어질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cf. 24:1-10).
    
    
    
2. 유다 왕실에 대한 심판(11~12절)
“유다 왕의 집(11절)”과 “다윗의 집(12절)”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왕을 포함하여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다. “이제 유다 왕실에 말한다.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다윗의 왕가는 들어라. 나 주가 말한다. 아침마다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라. 너희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어라.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악행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서 불탈 것이니, 아무도 끌 수 없을 것이다.” (새번역_11~12절)
    
“아침마다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 주라”고 말씀하신다. 공정한 판결을 통해 약자의 권리가 강자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라는 말씀이다. 공정한 재판과 약자의 보호는 왕권의 의무이자 의로운 통치의 전제조건이다. 권력과 부와 사회 경제적인 지위에 따라 흔들리는 판결은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에 빠뜨린다. 또 성경에서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밝아오는 “아침(새벽)”은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는 시간으로 언급된다(cf. 시편 46:6; 90:14; 143:8). 이스라엘 사회는 송사가 있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왔다(삼하 15:1-6).
    
왕과 지도력의 책임이 있는 자들이 이러한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를 등한시 하면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는 여호와의 진노의 불(10절)”에 떨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맡기신 본분을 망각하고 불의를 행하는 통치자들을 반드시 멸망시키신다.
    
    
    
3. 예루살렘 백성들에 대한 심판(13~14절)
여호와께서 지정학적인 위치(고지대의 요새)를 과신하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포하신다. 당시 예루살렘 백성들은 “예루살렘 불멸” 사상에 확고한 맹신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지정학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조차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7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다윗에 의해 점령할 수 있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여기에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려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역사적인 경험은 “성전 신학(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므로 무너지지 않는 왕조 신학(다윗의 집은 영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적절하게 조화되어 당시 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이라는 허영과 교만을 심어주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며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오.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오(13절)” 하며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백성들의 대적은 바벨론 군대를 도구로 삼으신 “여호와 하나님” 이셨다(13절 하).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택하신 여호와께서 직접 대적이 되어 예루살렘을 공격하시기에 지정학적인 장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예루살렘 주님의 자기기만과 교만을 향해 여호와께서 불 심판으로 응답하신다(14절). “수풀”은 예루살렘 주변의 울창한 수목 지역을 가리키고, “너희 행위대로”를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너희 행위의 열매를 따라”이다. 그들의 악행이 재앙을 열매 맺듯이 예루살렘의 교만이 예루살렘을 불바다로 만든다. 여호와께서 “능히 끌 자가 없는(12절)” 전쟁의 불로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드실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성전 신학과 왕조 신학의 교만에 빠진 예루살렘 주님의 악한 행실을 징계하시는 여호와의 심판이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새번역_잠언 16:18).”라는 말씀은 틀림이 없다.
    
    
    
나는?
-놀랍게도 예레미야를 괴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자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할 때는 잡아 가두더니(20:1-2), 말씀이 실현되자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중재 기도에 응답하리라는 확신은 없다. 그저 닥친 위기 앞에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의 하나로 보험 들듯이 혹시나 하고 요청한 것이다.
    
-성전 신학, 시온 불패 신학, 왕조 신학을 끝까지 붙잡은 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산헤립의 앗수르 군대를 철수시켜주신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재현되기만을 바란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만 다시 돌아오시라고 요청하는 꼴이다. 끝까지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시드기야의 수준이 이러니… 허어….
    
*시드기야 왕과 지도자들, 그리고 예루살렘 백성들이 살려면 이제라도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지 말고, 예레미야가 전하는 불편한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래야 회복의 기회라도 주어진다.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아니겠는가! 내가 듣고 싶고, 나의 안전과 평안과 풍요와 성공을 위한 말만 들으려는 유혹과 불편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있다.
    
    
-이러한 다윗 왕조에게는 철저한 심판의 멸망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성들에게는 다시 한번 살길을 여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심이 아니겠는가! 백성들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중에 선택하라 하신다. 그런데 생명의 길이 “항복하는 것”이다. 모두가 응전하고 있는 와중에 배신을 택하는 것이다. 하지 백성들은 깨달았어야 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 심판이 불가피한 나라를 등지라는 말은 바벨론을 숭배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심판이 확정되고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나라와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디에 있든, 어느 곳에 속해 있든,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라합이 가나안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한 것처럼 이미 화를 내리기로 결정된 예루살렘을(10절)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항복을 선택하라는 기회는 거짓 메시지와 거짓 신학에 빠져 거짓 안전과 거짓 확신에 갇히지 말고 심판을 수용하여 “살아만 있으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이다. 마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겔 16:6) 말씀하신 마음이다. 피투성이라도 살아남아야 회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항복하라는 말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말이다. 회개는 어설픈 고백의 차원이 아니다. 죄의 대가를 처절하게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포기하지 않는 처절함이다. 그렇게 죄의 처절함 속에서 회개의 처절함을 통해 살아남아야 새롭게 회복의 기회가 시작된다.
    
*항복은 치욕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그 치욕의 골짜기를 지나야 구원이 온다.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13절)’ 하면서 근거 없는 안전을 맹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이 친히 그들의 대적이 되어 “그들의 행위대로” 갚겠다고 선언하신다. 바벨론이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무기를 회수하고 전염병으로 예루살렘을 치실 것이다. 백성들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마음을 인간적인 연민도 거두셔서 잔혹하게 짓밟도록 허락하신다.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철저히 심판받는 나라가 될 것이다.
    
-사망의 길은 구원과 승리를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고, 안전하다 평안하다, 애굽이 우리를 구하러 온다고 외치는 지도자들에게 속아 예루살렘 성안에서 항전하다 어리석게 죽임을 당하는 길이다.
    
*세상에 속고, 자기 탐욕에 치우진 지도자에게 속아 그들이 나의 삶을 굳건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에 함몰된 이 나라의 일부 국민과 어쩌면 똑같은지 모르겠다. *내가 속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만 깨닫는다면 적어도 생명의 길을 고민하고 선택할 기회라도 얻어볼 수 있을 텐데…. 예루살렘 백성들의 무지와 편견이 소름이 끼친다.
    
-생명의 길은 성 밖으로 빠져나가 바벨론에게 투항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계획하신 징계와 연단, 정화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피투성이처럼 될지라도 “살아 있어야” 징계가 끝나고, 연단이 마쳐지는 그날 정화되어 다시 시작할 기회라도 얻는다.
    
*티끌만치도 가망이 없던 죄투성이였던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항복해야 예수님 십자가의 은혜가 보인다. 나의 죄성과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으면 주님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주님, 시드기야의 망상이 저에게도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 불편하더라도 경청하겠습니다.
*주님, 생명의 길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순종하는 길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세상이 원하지 않고, 세상에서 배신자라고 매도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십시오.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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