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서” 기도할 때 [시 102:1-11]
 – 2024년 02월 06일
– 2024년 02월 06일 –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이다. 표제가 매우 독특하다. 직역하면 “고난당하는 자의 기도, 그가 마음이 상하여 자기 근심을 여호와 앞에 쏟을 때”이다. “기도”로 번역된 “테필라”는 도움을 구하는 간청을 의미한다. 102편은 개인적인 탄식과(1~11절) 공동체적인 탄식(12~28절)으로 구성되었다. 표제가 바벨론의 기도문 형식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대체로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한 시인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며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4권(90~106편)의 맥락에서는 여호와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은 공의로 행해질 거라고 노래했다. 101편에서도 다윗 역시 공의로 통치하겠다고 다짐하며 노래했다. 그런데 이런 공의의 통치를 받지 못하여 억울한 고난을 당한 자가 102편에 등장한다. 그는 매우 심한 고통을 당하였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요청한다. 억울한 고난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간절한 노래다.
    
    
    
1. 여호와를 부름, 구원을 요청함(1~2절).
시편의 탄식 시편들은 “하나님을 부름, 고난을 묘사함, 구원에 대한 요청, 신뢰와 확신의 고백 등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102편은 이와같은 전형적인 탄식 시편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여 하나님을 부른다.
    
여호와께서 자기 기도를 들으시고 부르짖음을 받아들이셔야 함을 간절히 외친다. 이런 외침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몸부림이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더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취하는 신앙적인 태도이다.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2절과 12절 이후 다시 등장한다. 고난의 날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지 마시고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주실 것을 요청한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다. 그 간절함을 “속히(마헤르_빠른, 급히)”로 표현한다.
    
    
    
2. 고난에 대한 묘사(3~11절).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재난을 여러 가지 직유법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시인은 자신의 날이 구름 가운데 소멸하였고, 자기 뼈가 숯과 같이 타버렸다(3절)고 고백한다. 그만큼 자신의 고난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묘사하는 듯하다. 4절은 그의 마음이 풀 같이 쇠잔(야베쉬_마르다, 시들다)하게 되어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었고(음식을 먹을 기운조차 없다는 의미), 신음하다 지쳐서 뼈와 살이 달라붙었다고(5절) 신음한다. 6_7절은 광야의 올빼미, 황폐한 곳의 부엉이와 같다고 묘사하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와 같다고 토로한다.
    
3~7절은 고난을 당하여 음식 먹기를 잊었고, 도와줄 사람 없이 홀로 이 상황을 감내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 철저히 홀로된 시간에 그가 부르짖고 바라볼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었다.
    
    
8~9절은 시인의 고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먼저 원수들이 그를 비방한다고 한숨짓는다(8절). “비방하다(하라프)”는 “꾸짖어 수치스럽게 만든다”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원수들이 시인을 조롱하고 심지어 대적하여 맹세하기까지 하고 있음을 부연적으로 설명한다. 원수들의 비방과 조롱으로 인해 시인은 재가 그의 음식이 되었고 눈물로 음료를 빚어 마시게 되었다고 고백한다(9절). 이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황(4~5절)보다 더욱 악화된,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10~11절은 그와 같은 처절한 상황에서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한다. 시인에게 분노하고 진노한 존재가 바로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비방하고 조롱한 원수들(8절)이 있음에도 시인은 자신의 고난의 근원이 여호와이시라고 고백한 것이다.
    
여호와의 이와 같은 심판의 행위는 10절에서 “들어 올리다(나사)”, “던지다(샬라크_집어던지다)”라는 동사로 표현된다. 여호와께서 시인을 들어 올리셨고, 다시 그를 아래로 던지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극도로 분노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처절한 분노 가운데 있는 인생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시인은 11절에서 “내 사는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며, 말라 가는 풀과 같습니다.”(새번역) 라고, 한숨짓는다. 해가 짐에 따라 기울어지는 그림자에서 자신의 허무한 인생의 날을 읽어내고 있다. 지금은 존재하나 곧 사그라들고 말 인생의 허무함을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말라가는 풀처럼’ 자신이 소멸해 갈 것도 절망스럽게 토로하고 있다.
    
    
시인에게 과연 희망이 있을까? 고난을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시인이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시편 102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소망은 상황에 있지 않다.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께 있다. 인생을 통치하시는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소망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에 대한 묘사에서 결론 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로 계속 나아간다.
    
*고난이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소망은 흔들린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계속해서 나아가 기도하고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소망이 주님께만 있다.
    
    
    
나는?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새번역_약 5:13).”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기도하므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뢴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부르짖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출 2:23) 기억해 내 그와 같이 매달린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 내가 스스로 해결해 보려다 절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대해 보면 어떨까?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재난이 자신의 식욕과 수면을 빼앗았고, 육체를 손상했으며, 그의 사기를 떨어뜨려 피골이 맞닿아 있음을 토로한다(3~7절).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깊은 고통과 탄식 속에서도 긍휼함이 넘치도록 풍성하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지금, 여기에서 기도할 때다!
    
    
-원수들이 종일토록 훼방한다. 원수들은 그의 고난을 죄에 대한 징벌로 여기며 그에게 더욱 고통과 아픔을 선사한다. 대적들로부터 추방당하고 박해를 받았고, 적대자들은 그를 멸시하고 그의 이름을 조롱했다. 그런 멸시와 조롱 속에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끈질기게 기도한다.
    
-지금, 여기에서 기도할 때다!
    
    
-그런데 놀라운 시인의 고백이 이어진다. 그의 고통 원인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이다(10절).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려는 희망 속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기울어지는 그림자와 같은 인생의 날, 시들어 가는 풀과 같은 고난 중에 있는 인생을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다.
    
-하나님께서 “들어 올려 내던지는” 심판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가 도전된다. 아무런 소망 없는 상황에서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며 몸부림치는 시인의 모습에서 유일한 소망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침없이 고통과 불평을 토로하는 시인의 언어는 아무리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라도 당면한 고통과 고난의 고통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오히려 위로된다.
    
-가끔 세상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버린 것이냐며 조롱할 때가 있다. 악인들은 마치 하나님이 버린 것처럼 그를 대하며 조롱한다. 하나님이라는 뒷배가 사라진 시인을 마음껏 조리돌린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슬픔을 삭이는 것뿐이다. 슬픔을 양식 삼아 하루하루를 버틴다. 누가 봐도 하나님이 시인을 혐오스러운 것을 던지듯 던지신 것처럼 보인다. 시인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다! 그랬다면 부르짖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뿐 아니라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듯한 좌절과 고통 속에서 그래도 해야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실낱같이 남아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고통의 탄식과 세상의 조롱과 비난이 난무해도, 심지어 하나님이 날 던지신 듯한 절망이 엄습해 와도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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