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 나라, 광야가 에덴으로, 버리고 따름으로 누리는 나라 [막 1:12-20]
 – 2024년 02월 09일
– 2024년 02월 09일 –

세례 후 메시아로 선포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다. 시험을 이기신 주님께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신다. 더불어 그 나라를 함께 세워갈 제자들을 부르신다.

 

 

 

  1. 광야로 몰아내심, 시험받으심(12~13절).

마가가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것에 대한 묘사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훨씬 간략하다. 마가의 초점은 “광야, 사십 일”에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는 그들의 조상이 시험을 받은 곳이다. 또 마가의 “들짐승과 함께 거하셨다”라는 표현에 담긴 함의다. 이 문장은 이사야 11장과 65장을 반향하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회복이라는 그림을 새로운 창조라는 틀로 그려준다. 하나님이 회복하실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이란 다름 아닌 에덴의 회복이다. 이사야 본문은 하나님이 회복하실 종말론적 통치의 모습을 사람과 짐승들 사이 그리고 짐승과 짐승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으로 표현하였다. “들짐승과 함께 거하셨다”라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마가는 의도적으로 사탄의 시험을 과감하게 생략한다. 대신 들짐승과 함께하고, 천사들이 수종 드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펼쳤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광야 사십 일 동안 먼저 이루어졌다.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시는 예수님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1. 세례 요한의 체포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14~15절)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시점에서 요한이 옥에 넘겨진 후라고 특정하는 것은 예수님도 자신을 앞서 왔던 세례 요한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새번역_15절).” “때가 찼다”라는 표현은 크로노스(일반적인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하나님이 정하신 구체적인 시기)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에서 “가까이 왔다(안기겐)”라는 표현은 “도착했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가까움”의 의미도 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 나라와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의미하기에 통치가 완료된 것으로 의미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으나 동시에 그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을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언급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를 이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최종적인 성취를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그려준다.

 

 

 

  1. 하나님 나라와 네 제자를 부르심(16~20절)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부르신다. 구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는 장엄하고 찬란할 것을 기대하게 한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도 이 땅의 악과 악에 동조한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심판과 의인들이 신원을 받게 될 날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기대하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이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단지 제자들을 부르시는 데 그친다. 세상의 기대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모습이 분명한 간격이 있다. 죄 사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통치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통치를 드러내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곳에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출현하게 된다.

 

마가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어부였다고 직업을 밝힌다. 현대의 기준으로 당시의 직업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어업은 중요한 산업이었다. 당연히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것은 인기 있는 일이었다. 동시에 마가는 그들이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각자가 포기한 항목들도 기술한다. 왜 그랬을까?

 

그물과 아비, 삯꾼들을 버려두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순위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단지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모든 가족관계, 사회관계를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설명하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레미야 16:16에 근거한 표현인데, 주의할 것은 예레미야는 심판을 위해 사람을 모았지만, 예수님은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모으고 있음을 보게 한다.

 

 

 

나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공포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어 시험당하게 하신다(12~13절). 예수님은 마가는 기록을 생략했지만, 마태와 누가의 기록을 통해 시험에서 승리하여 하나님 나라 왕이 되셨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공언이 들려졌고 즉시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수 있었으나 성령께서는 광야로 내모셨다. 마가는 사탄의 시험을 생략한 대신 광야가 에덴동산이 된 모습을 묘사한다. 아담의 불순종은 에덴동산을 청지기 없는 광야로 만들었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불만은 광야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새 아담이자, 새 이스라엘 되시는 예수님의 순종과 성령의 이끄심은 광야를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한 실제의 새 에덴으로 만들었다. “들짐승과 함께 거하셨고…..”

 

-내가 어떤 지역, 환경 속에 사는 것 보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엄밀하게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곳은 들짐승이라도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임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나의 일상의 어느 곳이든, 어떤 상황이든 성령께서 이끄시고, 천사들이 수종 드는 곳은 광야와 같은 곳이라도 이미 에덴 동산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요한이 붙잡혔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신다(14~15절).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시며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신다.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리스도의 길을 앞서 와서 예비한 소중한 인물이었지만, “때가 차서” 선포하며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미루지 않았다. 요한의 투옥 소식이 예수님의 의지를 꺾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의미와 목적을 감당하기 위해 잠시의 어려움과 난관의 상황에 스스로 얽매이지 않는 태도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을지 절로 공감이 된다.

 

 

-제자들을 부르신다. 갈릴리호숫가를 지나다가 그물을 던지는 시몬과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셨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이자 제자로 부르심이다.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들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권세 있는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제자들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권세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른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둔 채,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선다.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최우선 순위였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제자로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각자의 모습이 다르고 사명이나 직무도 다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다.

 

 

*본문에서 “부름”이라는 이야기가 보인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걸어가셔야 할 부름, 세례 요한이 주님에게 세례를 베푼 후 걸어가야 할 부름,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불렀을 때 제자들이 들은 부름이다.

 

*주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늘로부터 들려진 음성에는 주님이 걸어가셔야 할 사명이 녹아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아들로서 받겠지만, 그 전에 혹독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한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께서는 주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그곳은 사탄이 시험과 들짐승의 위협이 있는 곳이었다.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이라는 낙원을 주셨으나 그의 불순종은 에덴을 광야로 만들고 만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불평과 불신은 지나가는 광야를 죽음의 장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새 아담되시고 새 이스라엘 되신 주님의 순종과 성령의 임재는 광야를 평화가 가득한 에덴으로 회복시키셨다.

 

*세상은 고통스럽다. 광야와 같다. 험난하고 위협이 가득하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세상이라는 광야로 이끄셨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 광야에서 성령님과 함께,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며 에덴을 누리는 삶을 사는 존재다!

 

 

*한편 세례 요한은 주님의 등장과 함께 퇴장한다. 그런데 그의 퇴장은 끝까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모습을 유지한다. 요한은 헤롯의 부정과 불의를 지적하다 잡힌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듯이, 이제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셨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나 요절한 청년에 불과하나, 성경은 그를 자기 사명을 다한 후에 떠나야 할 때 떠난 신실한 종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그의 퇴장 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왔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심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한편 그의 붙잡힘은 주님의 붙잡힘을 예고하는 복선이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꽃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붙잡힘과 죽음의 길을 걸으셔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사명의 길을 시작하셨다. 주님의 죽으심의 길로 인해 이후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이들의 길이 생명의 길이 되었다.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하나님 나라의 왕 되신 주님께서 평범한 일상에 있던 어부를 제자로 부르셨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라는 부르심 앞서, “회개하고 믿으라.”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자신의 자격, 상황, 신분, 여건 등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부르신 분의 계획과 의지를 믿고 따라오라는 명령이다.

 

*돌아보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부르신 분을 믿고 나오라는 명령이다. 이 부르심은 제자들이 “버림”을 결행하게 했고, 그 “버림”이 있었기에 “따름”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길의 핵심은 믿음과 순종에 있다.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은 고난(광야)으로의 부르심, 감옥으로의 부르심, 버림으로의 부르심이다.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보다 크시고, 신실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따를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는 부르심이다.

 

*나는 오늘도 믿음으로 광야를 지나면서 회복된 하나님 나라, 에덴을 누리겠다.

 

 

 

*주님, 광야와 같은 세상이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 에덴동산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어느 곳이든 그곳이 에덴임을 믿습니다.

*주님, 부르심에는 고난, 붙잡힘, 버림과 같이 이전과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신뢰하며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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