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 나라의 시작, 사탄의 나라 몰락 [막 1:21-34]
 – 2024년 02월 10일
– 2024년 02월 10일 –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신다. 거기서 율법을 가르치시고 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이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며 이전에 보지 못한 전혀 다르고 새로운 권위를 맛본다. 가버나움에 순식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그 후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를 고치시고, 그날 저녁 가버나움의 많은 사람을 고치셨다. 이 모든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난 것이었다.
 
본문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신 후 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이다. 가르침과 축귀, 병 고침은 그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새 시대, 새 질서, 그리고 새로운 통치를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 사역이다. 영적으로는 귀신의 입을 통해, 육적으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나고 퍼져 나간다. 특히 귀신이 고백한 예수님의 정체성은 매우 선명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 힘차게 닻을 올렸다.
 
 
 
1.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가르침(21~22절)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일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은 회당에서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 확장되고 있다. 가장 도드라진 점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존재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새번역_22절).” 회당에서 아무나 가르칠 수 없다. 회당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 언급 없이 예수님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가르치셨다. 더구나 그 가르침을 듣던 뭇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율법 교사인 서기관들보다 더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권위(엑수시아)”로 번역된 단어는 “통치력, 권력자”와 같은 의미와 함께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ability)”으로, 70인 역본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킬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이 단어를 두나미스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 우주적인 힘의 구조에 따르는 새로운 질서, 그리고 성도들에게 부여된 권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어떤 가르침이었는지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서 공생애 첫 모습은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이어진다.
 
 
 
2. 하나님 나라와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23~26절)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며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호소한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에게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수사적인 질문으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던지는 질문의 형식이었다. 사실상 절규에 가까운 표현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귀신 들린 남자 안에 다수의 귀신이 들어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모든 귀신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우리”일 수도 있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 그의 오심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고백은 귀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높은 권세(권위) 앞에 대항할 수 없고 그저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자기를 내버려 두기만을 바랄 뿐이다.
 
귀신의 이런 질문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 통치가 사탄과 그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통치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저항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를 감당할 수 없다. 마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권위 있는 것이었다는 기록 다음에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서술했다. 이는 귀신 축출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귀신들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귀신들의 쫓겨남이라는 주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사탄의 통치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위협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위협이 되는지는 예수님이 단지 말씀만으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모습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 말씀을 통한 예수님의 통치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이적은 사탄의 통치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승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얼마나 확실하고 통쾌한 승리인지를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을 듣고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로 울부짖은 후에 떠나버린다. 처절하게 패한 자의 최후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사탄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었다.
 
예수님의 축귀 사역은 복음 전파, 가르침, 병 고침과 함께 병행되는 하나님 나라 사역의 핵심 요소이다. “꾸짖다(에피티마오)”는 예수님의 권세 있는 선언으로 귀신을 굴복시키는 전문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은 귀신의 외침을 권세로 잠잠하게 하신다. 귀신에게는 경련과 비명만이 그의 비참한 최후를 대변한다.
 
귀신의 통치 아래 있던 남자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권위 아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의 놀라운 권위를 맛본 첫 번째 수혜자이다.
 
 
 
3.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27~28절)
이 놀라운 일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서로 웅성대며 심각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토해낸 말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이를 직역하면 “권위를 동반한 또는 권위로부터 나온” 새로운 교훈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런 권위를 처음 경험했기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반응한다. 사람들이 고백한 “권위”는 문맥상 단순히 말로 귀신을 제압한 예수의 권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러한 일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물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규정했다. 예수님의 이적은 가르침과 연관이 있었고 이 이적과 가르침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마가복음에서 지속해서 등장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저가 누구이기에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가?)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과 같다. 그 시대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 주어질 것이고 사탄의 세력은 결박될 것이다.
 
 
 
4.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과 많은 사람을 고치심(29~34절)
회당을 나오신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가장 먼저 부르셨던 두 형제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방문하신다. 추측키로 회당에서의 기적을 경험한 베드로가 어떤 목적을 위해 초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곳에는 베드로의 열병으로 누워있는 장모가 있었다. 당시 열병은 흔한 질병이었으나 그 정도에 따라 생명이 위태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바로 이 여인을 두고 예수님에게 묻는다(30절).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새번역_31절).” 이 일은 단순하게 기적을 말하려는 것보다 역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선취 되는 모습을 그려준다. 이사야의 글에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을 육신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이 되어 드러나고 있다.
 
이 일 후에 가버나움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난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32~34절). 공생애를 시작하신 직후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라는 통로를 통해서 매우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갈릴리 땅을 휩쓸기 시작했다.
 
또,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은 ‘해가 졌다’라는 것은 유대 시간으로는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안식일이 끝났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루가 끝난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예수님은 몰려든 환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정성껏 치유해 주셨다. 가버나움에 이처럼 많은 환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회복과 치유의 새 질서를 맛보는 시대이다. 귀신을 쫓아내실 때는 회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묵을 명령하신 것도 귀신의 권세를 철저하게 무력화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회당의 사건과 베드로의 장모 치유 사건은 최소한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이다(가버나움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안식일이 지난 지점이다). 유대 전통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거나 축귀를 행사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이 아직은 문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다(21~22절). 하나님의 아들이자 왕의 위엄이 담긴 가르침이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인 서기관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 차원이라면 예수님은 언약의 주인이시자, 모세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회당의 유대인들은 유대의 율법 교사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권위를 발견하였다. 또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듣고 본 권위와 권능”에 깜짝 놀란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놀라기만 했다. 예수님을(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생각하며 순종으로 나아갈 때 경외함으로 듣고, 그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한편 유대인에게 가장 거룩한 날인 안식일에 거룩한 책이 낭독되는 거룩한 장소인 회당이 더러운 귀신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어두웠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순종은 없고 ‘거룩’의 모양과 이름만 있는 곳 어디든지 악한 세력의 거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권위 있는 명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23~28절). 귀신들은 예수께서 등장하시자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두려워하였다. 하나님 나라 왕이 등장하자 사탄의 나라는 힘 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치유해 주셨다(29~31절). 사람들은 병든 여인에게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병이 떠나갔다. 피조 세계를 병들게 하는 악의 권세를 이기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잡아주신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일어나자.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32~34절).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곳에서는 어둠이 물러간다. 병든 곳에는 치유와 안식이, 분열과 다툼의 현장에는 화해가, 절망과 죽음이 휩쓰는 곳에 생명이 임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임을 믿는다면,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치유와 회복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는다.
 
-열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장모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긴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완전하게 회복되어 예수님과 제자들뿐 아니라 집에 찾아온 수많은 병자를 돌본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먼저 경험한 자가 앞서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있다. 먼저 알고, 깨닫고, 경험한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직 어둠의 권세에 매여 있는 형제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침묵 당한다. 가버나움에서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비롯한 각종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운 광야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인생들에 생명과 샬롬과 안식이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거짓된 귀신의 경배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하게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온 자는 환영하신다.
 
 
 
*주님, 하나님 나라가 임한 곳에 새로운 일이 일어남을 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살림의 생명과 치유와 회복”이 거침없이 일어남을 봅니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와 각 성도의 삶 속에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보고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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