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도하시고.. 복음 전하시고… 치유하시고… [막 1:35-45]
 – 2024년 02월 11일
– 2024년 02월 11일 –
가버나움 사역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그만큼 피곤하셨을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홀로 은밀하고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기도의 교제를 나누신다. 제자들이 찾아와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가자고 요청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전도를 위해 왔다며 다른 마을로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전도하는 중에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깨끗함을 구한다. 예수님은 그를 “만져 깨끗하게” 해주시고 강하게 침묵을 명하신다.
    
가버나움의 사역 이후 예수님은 조용히 기도하러 가신 것에 비해 제자들은 전날의 사역으로 인해 급격하게 일어난 대중적인 인기에 흥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관심조차 두지 않고 저주하기까지 하는 나병환자를 치유하심으로 자신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의 능력을 맛보게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엮는데, 그 특징은 “모두를 위해 여러 마을로”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놓지 않으신다. 한편 사역 초반에는 “소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은 한다. 사람들은 모두를 위해 여러 마을로 이동하는 예수님을 찾아 몰려들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이런 사역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 기도하시고,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35~39절)
예수님은 전날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 매우 피곤하셨을 상황이지만, 그런데 “기도”를 잊지 않으셨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에게 기도는 “무기력하게 울부짖는 군중들로부터 한발 물러서 전열을 가다듬는 피난처이기도 했고, 악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통로이기도 했다(필립 얀시_기도).”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신 곳은 “한적한 곳(에레모스 토포스_외진 곳)”이다. 마가가 “에레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의도적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고 했는데(12~13절), 역시 ‘에레모스’를 사용했다.
    
즉, 세례받으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소명을 확인했었다. 그 후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그곳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고 승리의 잔치를 가졌다.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후 가버나움의 폭발적인 사역 직후 왜 그런 광야(에레모스)로 다시 찾아가셔서 기도하셨을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기록은 세 번 나온다. 가버나움 사역 직후, 오병이어 기적 후(6:46), 대제사장에게 잡히시던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 35, 39)이다. 세 번의 기도는 나름대로 상황을 두고 있다. 본문은 인식일 하루 동안의 사역으로 “온 도시”가 그가 계신 집의 문 앞에 찾아올(33절) 정도로 그의 명성이 급격하게 올라가던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오병이어 기적도 비슷한 양상이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집을 나온 것이 아니라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얻게 된 명성을 상징하는 그곳에서 나왔다는 의미도 된다. 사람들이 가져다준 대중적인 명성이 예수님에게 일종의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역의 결과들(사람들의 명성)이 그를 붙잡으려 할 때 그곳에 머무시기보다 자리를 신속히(?) 뜨셨다. 35절에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여전히 캄캄할 때)” 한적한 곳으로 나아간 것은 가버나움 사람들의 시선을 가능한 덜 받기 위해서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예수님이 가신 곳인 “한적한 곳(에레모스 토포스_외진 곳, 광야)”은 곧 사역의 출발점이 되었다(1:9~11; 12~13). 이전에는 성령이 그를 “몰고” 갔으나(12절), 지금은 스스로 찾아가셨다. 그곳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으나 전후 문맥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앞서 광야를 배경으로 일어났던 세례(1:4~5, 9)와 시험 사건(12~13절)을 통해 적용해 보면 그의 명성이 올라가는 시점에서 사역의 출발점을 찾아가 세례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다시 붙들고 또 사탄의 유혹과 물리침 등이 가진 의미를 되새겼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께 유혹하던 것은, “돌을 빵으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라, 세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으니 사탄의 발에 엎드려 경배하라” 였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명성에 취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찾아와 “사람들이 찾는다”라는 가버나움이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38절)”로 가자고 하신 것이다. 명성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어야 할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예수님의 선택은 “그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이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밝히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새번역_38~39절).”
    
“다른 가까운 마을들(꼬모폴리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사용되었다. “꼬모메(동네, 마을)와 폴리스(도시)”의 합성어다. 마가의 다른 본문에서는 이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도시(폴리스)는 예루살렘(11:19)이나 가버나움(33절)과 같은 큰 지역을 가리킬 때, 마을(꼬모)은 갈릴리 연안의 벳새다(8:23)나 예루살렘 근처 벳바게(11:1)와 같은 보다 작은 지역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폴리스” 격인 가버나움에서 나오신 후 “다른 가까운 도시들(꼬폴리스)”로 가자고 하신 것은 의도적으로 더 백성들의 삶으로 들어가자 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도시 중심의 사역보다 더욱 사람 중심의 사역을 위해 움직이자는 의미가 전제된 것이다.
    
예수님의 확고한 소명 표명은 광야의 기도 직후 이루어진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소명을 광야 기도를 통해 재차 확인하셨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사역의 출발점에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광야로 오셔서 그곳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으신 후 갈릴리로 돌아가 하나님 나라 선포를 시작하셨던 것처럼, 가버나움 사역이 갑자기 폭발한 시점에 다시 광야로 나가셨다. 그리고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전도하러 가셨다.
    
예수님께 광야는 사역을 준비했던 공간이자, 사역의 방향을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온 지역으로 바꾸기 전 거쳤던 곳이었다. 광야가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었고, 그곳에서 그 음성을 들려주셨던 분에게 다시 기도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광야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라는 소식을 가능한 많은 지역에 아려야 한다는 소명을 확인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 예수님을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예수님은 “근처 다른 작은 마을들”로 가자고 하시며, “이 일을 위해 자신이 왔음을 선명하게 들려주신다. 예수님은 명성을 따라 살지 않으셨다. 소명을 따라 사셨다. 하늘의 통치를 이 땅에 편만하도록 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제 갈릴리 지방은 소문으로(28절) 듣던 예수님이 전해주는 하나님 나라를 직접 듣고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광야로 모여든 사람들(40~45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리며 자신을 치유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유대 사회에서 나병(레프로스)은 레위기 13~14장의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다루는 심각한 질병이다. 특히 정결법과 관련하여 그를 가까이하거나 만지는 자도 부정하게 되므로, 나병환자는 스스로 타인의 접근을 경계하고 소리쳐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를 간구하며,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이 나병환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치유는 확실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율법에 따라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을 넘어서 이렇게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올 수는 없다.
    
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원하시면”이라는 표현이다. 그는 이렇게 무례한데도 예수님이 저를 치유해 주시길 원하신다면 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나병으로 인해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한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내던져졌지만, 막무가내로 자신의 필요만을 구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예수님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비록 ‘믿음’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까이 나아온 행동과, 고백은 예수님을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예수님이시라면 충분히 치유해 하실 수 있는 믿음을 전제하여 자신의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지를 더 구한 나병환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때로 우리에게도 이런 언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통념으로 넘어서기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한계를 뛰어넘어 행동하는 간절함에 주님은 반응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율법과 사회적 통념의 한계를 넘어 나아온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사(스플랑크니조마이)”로 번역된 부분은 주로 “민망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로 받아들이지만, 사본에 따라 “오르기스떼이스”로 기록된 것도 있다. “분노하다”라는 의미인데, 다른 번역본들은 주로 이 의미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분노하셨을까? 어떤 학자는 죽음의 권세가 짙게 드리워진 나병에 대한 분노가 그를 치유하게 된 동기라고 해석한다. 예수님은 나병에 분노하셨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름다움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죄로 인한 깨어짐의 고통이 각종 질병으로 귀신 들림으로 인생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예수님의 분노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깊은 마음에서 나오는 애통이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그나마 남겨둔 안전거리의 경계마저 스스로 허무신다.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진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라고 답하시며 스스로 부정을 자처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토록 신뢰하며 나아온 그에게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선언하신다. 단지 정함과 부정함을 확인하는 제사장의 제한된 역할을 넘어 직접 부정을 정결함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권세 아래 나병은 그에게서 즉시 떠나가고 깨끗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바로 그에게 엄히 경고하신다(43절).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새번역_44절).” 이는 레위기 14장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 나병환자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을 파기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법이 바라보았던 실체이자 율법의 완성인 분이다. 구약의 규례를 따르라는 조치는 나병환자가 회복된 이후 공식적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라는 배려로 이해할 수 있다. 율법을 완성하신 분으로 율법에 자유로우시지만, 나병환자의 처지에서 그의 상황을 배려하신 것이다.
    
-이렇게 치유를 마치신 후 나병환자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나병은 치유할 수 없는 최악의 질병에 속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병을 치유하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예수님을 기적의 치유자로만 인식하고 따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정체성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증명될 것이다. 그런데 공생애 초반에 너무도 강렬한 치유자로만 각인되면 곤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하였다. 그는 도리어 적극적으로 알린듯하다.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언제가 확연하게 드러날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병은 격리되었고, 치료가 쉽지 않았으나 치유가 되었더라고 하더라도 제사장에게 보이고 치유에 따른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랫동안 비밀이 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에 따라 예수님의 대중적인 사역은 곤란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 드러내놓고 마을에 드나드실 수 없게 된 것이다. 한편 나병이 치유된다는 것은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중요한 항목 가운데 하나이다(마 11:5). 마가는 예수님의 나병환자 치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나는?
-주님은 새벽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가버나움에서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후였다. 마가의 기록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 후에도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6:46). 주님에게 기도는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 능력을 덧입는 시간이자,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 사명과 태도를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주님이 광야와 같은 현실을 이기는 길은 먼저 광야를 찾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과도하고 그릇된 명예와 찬사, 기대를 받을 때, 또 부당한 오해와 곤욕을 당할 때 자신의 소명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새롭게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영적 수원지였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는 세상을 맞설 수 없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출발하라.
 
*에레모스 토포스, 하늘의 소리를 들으셨던 곳, 그 음성을 들으려 나아가야 할 곳
 
*에레모스 토포스, 가장 잘 나갈 때 더욱 가야 할 곳
 
*올해 “에레모스 토포스”를 만들어 보시기 않겠는가?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도의 장소, 묵상의 장소, 목장모임의 장소, 공동체를 찾아 나아가보지 않으시겠는가!
 
*기다리는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나아가신다. 교회의 존재 목적 아닌가? 교회인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세상을 등질 수 있다. 공동체인 우리 더온누리교회가 세상의 명성이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아 끝까지 전하는 공동체로 서야 한다. 
   
*내가 원하고 필요한 신앙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 나에게 에레모스 토포스가 있어야 할 이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품어야 할 실재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도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기로 하셨다. 제자들이 잘못 보고해서가 아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먼저 명령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바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주님께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이다. 지금 더 필요한 곳, 더 시급하게 가야 할 곳이 어딘지 하나님은 아신다.
    
-맡겨진 사명에 집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리라. 자신의 사명이 온누리에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밝혀, 제자들의 관심이 사람들에게서 얻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신다.
    
-우리 공동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의 관심이 인기와 돈과 지위와 안정에 머문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없다.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고 선택하는 용기를 잃지 않을 때 건강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다.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다. 더 나아가 손을 내밀어 치유해 주신다. 유대 사회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고, 전염과 부정을 이유로 사람들에게 격리되어 사는 비참한 질병이었다. 전통적인 레위기의 법은 나병환자를 만지면 함께 부정하게 된다고 했지만, 주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손을 내밀어 자신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깨끗게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정결케 하며, 치유와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나라이다. 나의 삶에 이처럼 내가 가는 곳이 밝아지고, 정결케 될 수 있도록 늘 빛 가운데 행하리라.
    
-율법으로는 나병환자를 만지면 안 되지만, 그에게 손을 대어 깨끗게 하신 것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 세상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안타깝게 여기는,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게 한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을까?
    
*더러운 것을 만짐으로 내가 부정해진다”라는 것은 모든 종교의 상식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를 거스른다. “그가 만지심으로 깨끗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뒤엎는 놀라운 진리이다.
    
*이 기적은 오늘날 나에게도 일어났다.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만져주심으로 나의 죄는 그의 십자가로 옮겨갔으나 나는 깨끗해졌다. 그 죄가 주님을 더럽게 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주님은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를 확인받도록 하신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이는 사람들이 질병의 치유만을 목적으로 주님께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질병을 치유받는 것은 은혜중의 은혜이다. 하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이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는 적잖은 방해를 받는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심지어 영적인 필요라 할지라도 인간 자신이 추구하고 원하는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믿는다면 곧 그 한계에 직면할 것이다.
    
*내가 원하고 필요한 신앙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율법의 경계조차 뛰어넘어 그에게 치유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며, 지금 여기에 임하여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이다.
    
    
    
*주님, *주님, 나의 에레모스 토포스에서 늘 뵙겠습니다. 하나님을 늘 만나고 싶어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지켜내겠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길을 늘 걷겠습니다.
*주님, 율법의 경계조차 뛰어넘어 사랑하시는 행동하시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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