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세상에 이런 일이? – 지붕뚫고 주님 앞으로! [막 2:1-12]
 – 2024년 02월 12일
– 2024년 02월 12일 –
갈릴리 순회 전도를 마친 주님은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예수께 접근을 시도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어서 중풍 병자를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이를 들은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속으로 신성모독이라고 불편해한다. 그들의 내면을 간파한 예수님은 죄 사하는 문제로 모두를 끌어들인다. 갈릴리의 초기 사역은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가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본문은 그 권위가 “죄 사함”과 직결되면서 향후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할 전선이 형성된다.
    
본문은 2:1~3:5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논쟁 중에서 첫 번째 논쟁이다.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주님의 사역이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서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켜 준다.
    
    
    
1. 가버나움의 중풍 병자(1~5절)
가까운 다른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 사역을 진행하시고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오셨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사역이었고,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선포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사역도 병행하셨다. 이에 따라 주님의 명성은 더욱 올라갔다.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가 올라갈수록 하나님 나라 사역에 끼칠 수 있는 불필요한 불편함을 방지할 목적으로 “여러 날”을 더 갈릴리 다른 마을들에서 머문 후에 가버나움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금세 퍼졌다. 다시 베드로의 집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심지어 “문 앞까지도(2절)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2절하)” 하셨다. 헬라어 원문은 미완료 형으로 주님께서 도(하나님 나라 복음)를 계속 가르치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마가는 그 상황에서 중풍 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주님께 나아와 치유받은 상황을 마태복음에 비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마태복음에는 친구들이 중풍 병자를 어떻게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주님 앞에 데리고 갔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본문은 그의 친구들이 수많은 사람 때문에 지붕을 통해서 중풍 병자를 달아 내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 유대의 가옥은 주로 평지붕이었고 그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지붕은 흙과 짚 나무들을 이겨 구워서 만들었기 때문에 해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붕을 해체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상황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집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안전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침상째로 달아 내리려면 매우 큰 구멍이었어야 했다. 주님이 가르치고 있을 때 이런 행동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했음을 보여준다. 또 주님께서 언제 가버나움을 떠나실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그들의 행동을 자극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가는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보다 주님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다. 초점은 이들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마 9:2; 눅 5:20)” 입을 여신다. 먼저 그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평가하셨다. 주님은 1:15에서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복음을 믿으라.”라는 선포를 통해 처음으로 “믿음”을 언급하셨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확고한 믿음에 기초하여 주님께 고백했음에도 그의 ‘믿음’을 언급하지는 않으셨다. 반면, 본문은 중풍 병자의 네 친구의 행동에 대해 “그들의 믿음”으로 보신 것이다.
    
즉 친구들의 행동은 예수의 복음을 믿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임을 보증하신 것이다. 당사자인 중풍 병자의 믿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친구들의 간절함으로 보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붕을 뜯고 침상 채 달아 내리는 행동은 무척이나 민망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라고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반응하신다. 누구나 예상했을 저주스러운 묶임에서 자유를 얻는 치유의 선언이 아니었다. 주님은 나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죄 사함”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드러내신다.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죄 사함 받았다”는 신적 수동태에 대해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시는 주체임을 확고히 한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죄 사함의 선포를 주님이 하셨다는 데 있다.
    
이로써 주님께서 단지 육체의 질병 치유만이 아닌 근본적으로 영혼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는 최고의 권세이다.
    
    
    
2. 죄 사하는 권세(6~12절)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죄 사함의 은혜가 있으리라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공통으로 외쳤던 내용이다(사 29:18; 렘 31:34; 겔 36:25~27; 미 7:18~19).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런데도 죄 사함의 주체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굳게 믿었다(사 43:25; 출 34:6 이하).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 사함의 권세가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서기관들은 이에 경악했다. 주님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이해한다(6~7절). 주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기대되던 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10절은 서기관들이 마음으로 주님의 발언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 그들의 도전에 응답하시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놀랍다.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9절)”라고 되물으신 것이다.
    
이 말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하는 말이 더 어려운 말이 된다. 왜냐하면 즉각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은 그 말의 효력이 나타났는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죄 사함의 발언이 결코 쉬운 발언이 아니다. 그 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말이 불러올 파장은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기에 유대인의 정서를 고려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서 죄 사함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주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마무리하시면서 중풍 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유대인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요 9장). 물론 모든 질병이 직접적으로 죄에 관한 결과인 것을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중풍 병자의 경우 주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그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에 그의 중풍이 죄와 연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신 이 사건을 통해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 된다. 종말에 임할 메시아의 도래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중풍 병자와 친구들의 반응이 치유 후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가가 분문의 초점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지켜본 백성들은 “다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죄인들의 땅에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었다.
    
    
    
나는?
-가버나움에 예수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베드로의 집은 주님을 통해 치유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입구로는 도무지 들어갈 수 없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네 친구는 포기하지 않고 도저히 주님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지붕을 뜯고 침상째 예수 앞에 매달아 내렸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은 치유를 얻기에 충분했다고 보셨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할수록 무모해지고, 담대해지는 것 아닌가?
    
    
-독특하게도 주님은 중풍 병자에게 치유를 선언해야 할 대목에서 죄 사함을 선포한다. 신적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죄 사함의 주체인 듯 말씀하셨으나 서기관들이 듣기에는 예수 자신이 치유를 선언하는 듯하다. 서기관들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묻자(7절),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은 자 외에는 없으며, 인자가 그 권세를 가지고 있다”라고 대답하신다.
    
-그들이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이제는 성전이나 속죄 제물이 아니라, 성전보다 크시고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이 즉각적인 중병병자 치유 선언보다 쉽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주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10절)”
    
-인자되신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신의 권세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더 어렵다고 여기는 것, 즉 중풍 병자 치유를 시연하신다. 그 기적을 보고 경험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오늘날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와 그가 이 모든 일을 대신하여 묵묵히 걸어가신 십자가를 거론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치유보다 말씀이 먼저였다. 주님은 입구까지 가득 메운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를 조곤조곤 설명해 주셨다. 치유나 기적과 같은 극적인 역사를 갈망하며 모인 이들에게는 실망감이 가득했을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의 가르침이 없는 기적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만 더 키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치유의 이적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사인(sign, 징후) 역할일 뿐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설명하며 설득하는 일은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당장 극적인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가장 빠른 길이고 옳은 길이며 효과적인 길이다. 감성만 자극하는 것보다 체계적인 말씀과 묵상으로 건강한 신앙 체질을 다듬어 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식과 관습을 뛰어넘게 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주님은 남의 집을 손상하면서까지 치유 받기를 원하여 주님께 나온 네 친구와 중풍 병자의 행동을 “믿음”으로 간주하셨다. 얼마나 갈망했는지 드러난 행동이었지만, 그들 안에 이 세상 가치관을 전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담대한 믿음으로 보신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상식과 관습을 벗어났고, 체면이나 염치도 아랑곳하지 않는 몰상식하고 몰염치한 행동이었지만, 중풍을 앓고 있는 친구를 위한 용맹한 믿음의 행동으로 보셨다. 상식과 예의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주님의 편에 서기 위해, 희생이나 손해를 무릅쓰는 담대한 용기도 필요하다.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던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셨다는 소문에 반응하여 결행하는 결단력이 혹시 무디고 무르기 그지없는 믿음을 단단하게 갈고 닦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닐까?
    
*주위에 영혼의 중풍을 앓고 있는 이를 위해 나는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님은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보다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치유보다 사죄가 먼저임을 보이신 것이다. 치유를 선언할 대목에서 “죄 사함”을 선언하시는 것을 본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되묻는다(7절).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은 자 외에는 없으며, 인자가 그 권세를 가지고 있다”라고 선명하게 대답하신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보다 더 크시고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의 사죄 선언과 치유하심을 보고서도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메시아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했다. 반면 중풍 병자 치유로 다시 확인된 주님의 능력을 목격한 무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듣고서도, 보고서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이 아니라 들은 대로 본 대로 반응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건강한 믿음과 인격으로 살아내야 하리라.
    
    
    
*주님, 감성만 자극하는 목회가 아니라 우직하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하겠습니다.
*주님, 주님 앞에 이토록 간절하게 영혼을 데리고 간 적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찾는 이를 향한 섬김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들은 대로, 본 대로 반응하여 영광을 돌리는 생동하는 신앙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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