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차별 없이 사랑, 새 시대 새 질서 [막 2:13-28]
 – 2024년 02월 13일
– 2024년 02월 13일 –
율법과 관련된 두 가지 논쟁을 담고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규정한 부정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금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금기를 의도적으로 깨뜨리시는 듯하다. 또 율법이 규정한 안식일 규례도 새롭게 해석하신다.
    
본문은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세리였고 그가 일했던 곳은 가버나움에 있는 세관이었다. 당시 세리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하기에 부적합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신다. 충격이었을 것이다. 또한 금식에 관한 질문에 결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대답하신다. 율법이 규정한 안식일 규례도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1. 세리 레위를 부르심(13~17절)
주님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을 것이다. 그런 중에 주님은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신다. 사람들에게 명성이 있는 유명한 “랍비”가 세리와 같은 사회적 외인을 자기 제자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당시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레위는 즉각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했다. 주님은 레위를 부르신 후에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 자리에 앉으셨다. “죄인들(15절)”이라는 용어는 서기관들의 십일조나 정결 규례 등을 지킬 수 없었거나 지키지 않았던 일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 단어는 더 넓게는 세리뿐 아니라 부도덕한 사람들(눅 7:37 이하), 이단자들(요 9:16 이하), 이방인들(갈 2:15)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이들과 경건한 유대인이 식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정결 규례 상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에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묻는다(16절).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새번역_17절) 라고, 대답하신다.
    
바리새인들의 최우선 순위는 율법이 규정한 계명들에 대한 순종이다. 반면 주님에게서 우선순위는 사람들을 향한 사명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구약에 근거해서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 시대에는 율법을 새롭게 이해해야 함을 암시해 준다. 옛 시대(구약)의 빛 아래에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건강한 자이고 의인으로 이해되지만, 예수님 안에서 동튼 새 시대에는 사람들은 모두 병든 자이고 죄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옛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가 동텄음을 인식하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2. 금식에 대한 질문과 대답(18~22절)
이번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주님께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다(18절). 이로 보건대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토라가 정한 한 번의 금식(대 속죄일)과 다른 금식 규정들뿐만 아니라, 정규적으로 일주일에 두 차례(월, 목) 금식했던 것으로 보인다(눅 18:12). 주님은 금식 자체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먼저 결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대답하셨다(19절). 결혼은 기쁨의 시간이지 금욕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이 관점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 안에서 이미 드러났다. 이는 이미 예견된 메시아적 연회 이미지를 반영한다. 메시아적인 연회에서 메시아 자신과 백성들이 금식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의 지도자를 이미 잃은 것과 같은 일이 언젠가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발생할 것을 말씀하시며 그때 금식하라고 이르신다(20절).
    
주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이 말씀은 정결 규례와 금식에 대한 주님의 이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21~22절)는 것이다. 이는 둘 다 새것이 갖는 힘을 옛것이 감당할 수 없다는 분명한 주제를 밝힌다. 새 천 조각은 당기는 힘을, 새 포도주는 밀어내는 힘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낡은 옷을 수선하는 데 새 천 조각을 붙이게 되면 물에 젖게 될 때 새 천이 가지는 수축력이 기운 부분을 끌어당겨 옷이 결국 망가지게 된다. 새 포도주는 발효 시 강한 가스를 뿜어내기 때문에 가죽 부대는 그 힘을 충분히 견뎌야 한다. 그런데 오래된 가죽 부대는 그런 힘을 반복적으로 견디면서 서서히 탄성이 상실된 상태이므로 금세 터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등장은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옛 시대가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없으며, 옛 질서는 새 질서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옛 시대에 속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새 시대 새 질서의 주인공이신 주님을 비난하고 있다.
    
    
    
3. 안식일 논쟁(23~28절)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동 중 밀밭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제자들이 밀밭에 길을 내며, 이삭을 잘랐다(23절). 이 장면을 바리새인들이 목격하고 주님께 도전하듯 질문한다.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십계명에 근거한 안식일 법은 39개의 구체적인 행위를 규제하는 미쉬나 규정으로 발전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철저하게 지켰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무엘상 21장의 다윗 이야기를 꺼내셨다.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 성소가 있는 놉으로 향했고 극도로 시장했던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음식을 구했으나 제사장만 먹도록 율법이 규정한 진설병 외에는 다른 음식이 없었다. 이때 아비아달은 몇 가지를 확인한 후에 진설병을 다윗에게 건넨다. 이 이야기가 통해 주님께서 말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인가?
    
다윗이 분명 율법을 어겼음에도 유대 역사상 누구도 다윗을 정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즉 유대인들은 다윗의 이 행동을 예외적인 것으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안식일 법이 백성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관습을 뒤엎으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새번역_27절).”
    
놉 성소 안의 다윗이 율법을 초월했다면 안식일의 주인인 인자 안에서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초월하는 것은 당연하다. 옛 안식일 법으로 새 안식을 누리는 제자들을 정죄할 수 없다.
    
    
    
나는?
-주님의 치유에는 차별이 없으시다. 주님은 영혼의 의사이시다. 의사가 필요한 자는 자기 병을 인정한 환자다. 아픈 것을 인정하고 찾아오면 그가 누구든지 불문하고 고치신다. 이방인인지 유대인인지 묻지 않는다. 정결한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지 않는다. 할례를 받았는지도 따지지 않으셨다. 주님은 치유하심에 있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바리새인들이 규정해 놓은 의인이든 죄인이든 구별하지 않으셨다. 진정한 참사랑은 차별이 없는 사랑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시다. 이것이 주님의 사명이다. 주님의 치유가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주님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어디든지, 언제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터가 되며,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다. 차별 없이 부르시는 주님을 따라 차별 없이 살아가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리라.
 
    
-정기적인 금식을 하지 않는 주님과 제자들을 향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도발한다. 주님은 그의 오심을 준비하던 세례 요한의 때는 죄를 애통해하고 사죄를 간구하는 금식의 때였지만, 신부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으로 깨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신랑 예수께서 직접 오셨으니, 지금은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라고 말씀해 주신다.
 
*지금은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릴 때이다. 주님께서 깨진 세상, 깨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은 금식 같은 종교 행위로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신랑되신 주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율법적인 삶으로는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다.   
 
 
-새 시대, 새로운 나라는 안식의 나라이다. 인류에게 쉼을 주고 하나님도 안식을 누리실 새 창조의 계획을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통해 계시해 왔는데, 이제 주님께서 그 안식의 경륜을 완성하시려고 오셨음을 천명한다. 그것은 한 날(안식일)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님의 통치 아래서 쉼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참 안식의 시대를 열어주신 주님이시다. 하나님 나라는 안식의 나라이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거나 죽음의 겁박에 눌려 절절매는 인생에서 해방하려고 주님이 오셨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을 통해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안식의 길로 알고 있던 세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과 새 창조를 통해 영원한 안식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한 날(안식일)만이 쉼을 누리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안에서 모든 날이 안식을 누리는 날이 되게 하셨다. 헌 부대가 새 포도주를 감당할 수 없듯 껍데기만 남은 옛 시대의 가치관과 관습으로는 생명이 역동하는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
    
    
    
*주님, 차별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차별 없는 사랑을 행하겠습니다.
*주님, 지금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길을 따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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