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높아진 인기, 교묘해진 암투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세우기는 계속된다. [막 3:1-19]
 – 2024년 02월 14일
– 2024년 02월 14일 –
본문은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태도와 관련하여 발생한 두 번째 논쟁으로 시작한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준 사건이다. 이 일들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대하여 적대적으로 전향한다. 심지어는 이 논쟁 이후 헤롯당과 합세하여 주님을 죽일 음모까지 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큰 무리가 주님을 따르고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계속해서 치유하신다. 주님은 더욱 힘을 내어야 할 갈릴리 지역 후기 사역을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열둘의 제자를 세우신다. 열둘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신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을 세우시려는 목적을 엿보게 한다.
    
    
    
1.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1~6절).
주님께서는 갈릴리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치유 사역을 이어가셨다. 이때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신다. 제자들과 밀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마을이 어디인지 불확실하다. 그런데 주님과 제자들을 쫓아다니던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주님께서 들어가신 회당에 주님을 고발할 기회를 엿보려는 밀밭의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 손 마른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통해 주님을 고발할 기회로 삼는다.
    
미쉬나에 따르면 안식일에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의료행위를 하는 것은 안식일 법을 깨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에 따르면 이 사람은 다음 날 치료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편 손 마른 사람은 주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그래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주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시는지 지켜보고 있다.
    
안식일 준수라는 덫을 놓고 “한 편 손 마른 자”를 미끼로 유혹한다. 주님께서 걸려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들의 마음과 계략을 모를 리 없다. 마치 기다렸고 보란 듯이 한편 손 마른 사람을 회당의 중앙에 세우신다. 그리고 앞자리에 앉아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새번역_4절)
    
일단 자신의 메시아 됨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를 꺼리신 주님의 행적에 비추어 보면 의외다. 주님께서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각각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들은 침묵한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인 전통적인 유대인의 안식일 법의 기준은 한편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위급한 사항이 아니다. 하루 더 기다려 다음날 고치는 것이 선을 행하는(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된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은 다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든 날이다(2:27). 그렇기에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는 논리다. 안식일 본래의 목적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면, 안식일에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당대의 율법 이해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유대의 랍비 문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논리였다.
    
주님은 묵묵부답인 회중들에게 노하셨다. 이 노하심이 유대인들의 완악함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자신의 사역을 통해 계속 그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 대한 화냄이다.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헤롯 당원의 충격적인 반응을 덧붙여 놓았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모의”한다고 기록한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공조할 수 없는 집단이다. 그런데 주님을 죽이는 일에 한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과 관련하여 적어도 신학적인 차원에서 주님의 죄목을 조작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실패를 인지하고서도 주님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2. 주님의 물러감과 큰 무리의 따름, 지속되는 치유(7~12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모략을 아신 주님은 회당을 떠나 잠시 바닷가로 물러나셨다. 그런데 이전과 다른 것은 “큰 무리가 동서남북에서 몰려들었다”라는 것이다. 유대, 예루살렘(남쪽), 이두매(남동쪽), 요단강 건너편(동쪽_베뢰아), 두로(북쪽)와 시돈(북서쪽) 근처에서 주님께서 하신 모든(큰) 일을 듣고 몰려왔다(7~8절). 그들은 저마다 주님에 대한 필요가 있었던 사람들(온갖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_10절)이다.
    
주님은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으나, 너무 많은 사람이 에워싸며 만지려고 했기에 부득불 배에 올라 거리를 확보해야 했다. 이 단락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1절).”라는 귀신들의 반응을 소개하는데, 주님은 역시 귀신들에게 이 일을 드러내지 말 것을 엄히 경고하시기도 하고, 자신을 스스로 무리에게서 격리하시기도 하셨다.
    
    
    
3.열두 제자를 부르다(13~19절).
주님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신 것처럼, 다음 사역을 위해 세우신 것이다. 주님의 제자는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음이 무기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처음 네 명(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두 번째 레위를 부르셨다. 이 안락에서는 열두 제자의 부름이다. 부르시는 기준은 먼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고, 둘째, 내보내어 “말씀을 전파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고(14~15절) 부르셨다.
    
매우 분주한 공적 사역 가운데 열두 제자를 따로 부르시고 사적인 친밀감을 위해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제자들도 분주한 사역의 현장에서 지쳐있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제자들에게 안식과 힘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무엇을 위해 구별되어 부름을 받았는지,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며 소명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제자들도 주님처럼 “전도도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부르셨다. 주님의 사역을 제자들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부름을 받은 즉시 보냄을 받았다. 이와 같은 모습이 곧 제자의 정체성이다.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며 똑똑히 보았고 들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장차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받은 것이다. 열두 명의 제자 중에서 시몬, 야고보, 요한에게 특별한 이름을 더하신다. 공교롭게도 이 세 사람은 제자 그룹에서도 따로 구분된다(9:2).
    
주님께서 열두 명을 세우신 것은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 땅 가운데 임하는 하나 나라로 인해 새로운 하나님 백성이 탄생할 것이라는 암시가 된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을 염두에 두신 주님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해석한다.
    
    
    
나는?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주시하는 시선 속에서도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는 담대함이 돋보인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단이 도전된다. 주님을 향한 적대감은 인기가 올라갈수록 비례하여 깊어진다. 사람들은 더욱더 많이 몰려왔다. 이에 주님은 열두 제자를 세워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함께” 감당하게 하신다.
    
-요즘 “함께” 사역하는 것을 더 절실하게 깨우치고 있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져 갈수록 자기 능력과 원함으로 특출나게 사역하는 이보다, “함께” 마음을 맞추어 사역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체감한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워 하나님 나라 사역을 분담하게 하시면서, 먼저 세우신 목적의 우선을 “함께 하시려고” 세우셨다는 기록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리적인 공간에서 함께 한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에 마음을 모으는 함께 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요즘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호소했던 고백이 통감 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주님의 마음을 알아 주님의 마음을 따라 “함께” 세워가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셨을 것이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반대자들의 살해 음모를 아시면서도 선을 행하는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다(1~6절). 주님께서는 늘 “아는 대로, 믿는 대로” 행동하셨다. 안식일과 관련해서는 안식과 회복,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셨다. 전통에 따른 안식일 법을 준수하는 것은 존중하되, 생명을 살리는 것, 선을 행하는 것과 선택해야 할 때 주님은 주저하지 않고 생명과 선을 선택하셨다.
    
-전통과 명분과 실리(實利)로 사는 삶이 아니라 소명 따라 사는 삶임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이와 같은 삶은 거짓과 계산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옳은 일에 생명을 건다. 하나님 나라 제자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선하고, 양심에 거짓이 없어야 하겠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고발하려 한다. 안식일의 참뜻을 실현하고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들의 영혼은 말라 있었다. 결국 주님의 실수를 기다리며 매달리는 긴장감 속에 참 안식(쉼)을 누리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었다. 또한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주신 안식일에 안식일의 주인을 죽일 계획을 모의한다. 이미 자신들의 영이 죽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연대하여 살해 음모가 있자, 잠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신다. 아직은 맞설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곳까지 어느새 몰려와 주님을 에워싸고 밀치자, 작은 배를 준비하여 적당한 거리를 두어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고, 질서 있게 병자들을 고치셨다(4:1).
    
-주님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아신다. 그 일하심에 있어 지혜와 명철로 하신다. 주님에 대한 백성들의 설익은 기대가 초래할 심각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나에게도 이와 같은 지혜가 간절하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구분하는 목사여야 할 텐데…. 주님께서 나에게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순전함을 주셨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들(13~19절)은 아직은 보잘것없고 약하지 약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곧 부활의 권세로 일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부름을 받자마자 그런 능력 있는 일꾼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세우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셔서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셨다. 이렇게 현장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직접 보내며 성장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을 배우는 일에서부터 시작이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환영하지 않는다(2, 4~6절). 악한 눈으로 주시하고 합당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한 판단력이 마비되었기에 버젓이 헤롯당과 함께 주님을 죽일 공모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경건은 이처럼 위선적이었다.
    
-마음이 굳어, 말씀이라는 지식을 통달했을지라도,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일에는 지극히 편향적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말씀과 율법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마음도 이렇게 완악함으로 비틀어져 있지 않는지 되돌아본다. 말씀의 거울 앞에 늘 나를 비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다. 나도 언제든지 내 입장과 명분, 전통에 함몰되어 생동하는 말씀을 보고서도 굳어진 마음과 마비된 양심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를 위한 나라이지만, 모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무리 값진 조언을 해도 자식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없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진심으로 수용하면 복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것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고 많이 기다리시지만, 아무것도 기계적으로(자동으로) 되는 것은 없다. 받아들여야 하나님 나라는 나의 나라가 된다.
    
*안식일 회당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보인다. 손 마른 자와 영혼이 마른 자이다. 주님을 통해 참 안식을 경험한 이가 있지만, 안식일에 안식일의 주인을 시험한 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주님에게서 많은 가르침과 이를 입증하는 유례없는 기적을 보았지만, 주님은 감시와 경쟁의 대상일 뿐이었다. 안식일의 참 본질에 관한 질문에는 침묵하고, 그 목적과 본질을 따라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죽이려고 의논한 것이다.
    
*선을 행하여야 할 안식일에 손 마른 자의 고통에 눈감는 그들이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었다. 생명을 누리라고 주신 날에 생명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민 그들이 진정 안식일을 범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위해 주신 안식일을 사람을 해하고, 사람을 외면하는 날로 만들었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신 주님을 죽이려는 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무리가 동서남북 각지에서 주님께 나아왔다. 주님을 종교적인 경쟁자로 여긴 자들은 주님을 죽이려 했지만, 주님을 치유자로 여긴 자들은 간절히 찾았다. 주님은 그렇게 나온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몸에 하나님의 나라를 아로새겨 주셨다. 그들의 눈과 귀에 하나님 나라 왕의 흔적을 남겨주셨다.
    
*주님은 자신을 모른 채 찾아온 무리는 진심으로 상대해 주셨으나,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귀신은 도리어 잠잠하게 하고 쫓아내셨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무리에게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리려고 힘쓰셨으나, 잘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귀신은 분명하게 거부하셨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바른 지식이 차고 넘치더라도 이에 걸맞은 순종으로 나아가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주님을 간절히 찾는 무지가 더 낫다.
    
    
*주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는 이제 늘 주님과 함께하면서 새 이스라엘, 교회의 대표로 양육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할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훗날 사도로 불릴 것이며,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길 이들인데, 주님은 출신, 성격, 직업, 관심사 등이 모두 다른 자들을 부르셨다. 똑같은 마음, 출신, 환경은 한 명도 없으나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왕 아래에서 한 사명으로 한 가족이 될 것이다.
    
*더온누리 공동체도 이런 기대를 품는다. 주님께서 더온누리 공동체로 불러 모아 주셨다. 저마다 세상에서 다른 자리, 다른 기대, 다른 욕망을 품고 살았으나 이제 주님 안에서 한 부르심, 한 사명, 한 생명을 위해 공동체로 모였다. 영원한 스승이 되신 주님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각자가 부르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님, 손 마른 사람처럼 주님의 참 안식을 경험하는 삶이기를 갈망합니다. 영혼이 말라서 주님의 사역에 경쟁과 음모를 가져오지 않도록 늘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 주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그에 걸맞게 진실하게 살아내겠습니다. 힘을 주십시오.
*주님, 모두가 다르지만,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로 우리를 부르신 줄 압니다. “함께” 잘살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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